일본에 가서 내가 처음 배운 말은 좀 「나쁜 말」이다. 내가 1년 동안 남편과 헤어져 살게 되었다고 얘기하자 50대의 부인들이 이런 말을 가르쳐 줬다.『데이슈 겡기데 루스가 요이』― 남편은 건강하고 집에 없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의 속담인데, 몇년 전 옷장에 넣어 두는 방충제 「단스니콘」의 광고문안으로 등장하여 새삼 유명해 졌다고 한다. 집에 남편이 없어야 좋듯이 옷장에 벌레가 없어야 좋다는 뜻이니 얼마나 고약한 비유인가.
이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한 남자가 더 고약한 말을 가르쳐 줬다. 『일요일의 남편은 큰 쓰레기』란 말이다.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서 온갖 시중을 들게 하는 남편이란 내다 버리고 싶을 만큼 귀찮은 존재라는 뜻이다.
중년 이후, 아내로부터 알게 모르게 구박받기 시작하는 가엾은 남편들을 골리는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년 퇴직한 남편은 젖은 낙엽』이란 말도 있다. 젖은 낙엽이 신발바닥에 착 달라붙으면 여간해서 안떨어지는데, 노년의 남편 역시 아내로부터 안떨어지려 한다는 소리다.
일본의 노년이혼 증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전형적인 예로 흔히 듣게 되는 얘기는 이런 것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퇴직금을 받은 남편은 아내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간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절하면서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고 하직 인사를 한다. 한평생 소리없이 불만을 참다가 남편이 퇴직금을 받았을 때 위자료를 듬뿍 받고 헤어지려는 아내들이 늘고 있으니, 인생의 황혼에 아내와 돈을 동시에 잃지 않으려면 「젖은 낙엽」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남편을 골리는 말들은 몇년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간 큰 남편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밤 늦게 집에 와서 밥 달라는 남편,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 남편, 아내에게 그 돈 다 어디 썼느냐고 불평하는 남편, 이사 가는 날 짐차에 빨리 올라타지 않는 남편… 등등으로 가볍게 시작된 그 시리즈는 계속 신조어가 쏟아져 나와 장안의 화제를 휩쓸었는데, 유머속에 한국 남편들의 위상이 살짝살짝 드러나는 것이 묘미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도전을 받고, 남편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은 유교권 나라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특히 일본의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아내에게 사랑을 거의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화한 아내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갈등의 수습에도 서투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다. 『남자는 말이 없다. 그저 마실뿐…』이라는 맥주광고가 히트한 적이 있는데, 과묵함이야말로 남자의 매력이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인사를 정년퇴직할 때까지 아끼다가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는 아내의 이혼통고를 듣게 되는 남편들이 속출하고 있다면 과묵은 더이상 남자의 멋이 아닐 것이다.
「위기」에 빠진 일본 남편들을 돕기 위해서 주간지들은 「아내로부터 이혼당하지 않는 법」이라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들을 싣기도 한다. 그 기사에 의하면 아내가 다음과 같은 증세를 보일 때는 경계해야 한다. 남편과 여행하는 것보다 여자친구들끼리 여행하는 것을 더 좋아할 때, 늘 남편에게 하던 불평이 사라지고 조용해졌을 때, 식탁위의 반찬들이 점점 줄어 들때, 남편은 일단 긴장해야 한다. 아내가 자기이름으로 통장을 갖고 있는지, 그 통장에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 보는 게 좋다.
「큰 쓰레기」니 「젖은 낙엽」이니 하는 말을 당장 알아 듣고 웃음을 터트린다면 그는 물론 결혼한지 오래 된 사람이다. 날마다 같이 있고 싶어 애태우던 갓 결혼한 부부들이 어떻게 그 고약한 말들을 알아 듣겠는가. 오래 된 결혼생활은 타성에 빠져 금가는 것을 모르기 쉽다. 사랑에는 환상이 있어야 눈이 멀 수 있는데, 환상은 커녕 상대방의 온갖 결점들이 돋보기를 쓴 것처럼 잘 보이니 즐거움보다는 지겨움이 쌓이게 된다. 그러니 가끔 기분을 바꿔서 서로에게 이렇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
『나를 사랑해? 사랑한다고 왜 말 안해? 사랑하느냐고 왜 묻지도 않아?』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야, 라고 코웃음치는 단계가 오면 이미 때는 늦다. 어느날 갑자기 아내로부터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는 하직인사를 듣는 것이 어찌 일본 남편들만의 비극이겠는가.<장명수 편집위원>장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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