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정 검찰총장의 비자금수사유보결정은 일찍이 검찰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현실적 파장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아울러 이런 중대한 국가적 결단의 짐을 정치적 이해의 영향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어야 할 검찰이 떠맡아야 하는 나라 현실이 가슴아프기도 하다.하지만 정치권은 물론 경제·민생·검찰 등 우리 모두가 지금 함께 겪고 있는 오늘의 국가적 위기가 통상적 역할분담만으로 풀 수 없을 정도로 순서나 책임이 뒤엉켜 있고, 파국상황에 대한 당장의 대안도 없다고 볼 때 이번 결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차원에서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결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그런 선택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또 다른 우리의 소망은 이번 선택이 그런 선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 정도로 각 분야가 분명히 제자리를 잡아 가는 계기가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검찰이 정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결과적으로 정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을 불사하는 사태란 법치주의나 검찰중립화를 위해 두번 다시는 없어야 하겠다.
우리가 이번 결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은 검찰총장이 밝힌 것처럼 검찰의 순수하고 독자적인 결단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검찰이 뭐래도 이번 결정은 검찰의 생리상 검찰을 지휘할 권한과 책임이 있는 통치권과의 지시나 사전협의에 따른 것이라는 심증을 우리는 갖고 있다. 물론 엊그제의 수뇌부회의를 비롯, 검찰내부 의견이 이번 수사에 부정적이었다는 변명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검찰의 입을 통해 비로소 표출된 국민들의 나라걱정에 공감할 수 밖에 없기에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사실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지도부에 의해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에 대한 비자금 의혹이 관련자료와 함께 검찰에 고발되었을 때부터 이번 고발과 수사의 무리함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었다. 김총재에 대한 고발이 김영삼 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문제와 이회창 신한국당총재측의 실명제법 위반논란으로 확대되면서 정치는 물론 대선자체가 표류될 위기감을 국민들이 절감했던 것이다. 재계는 나라 경제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비자금 수사를 또 다른 악수로 규정, 반발하기에 이르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회단체들도 비생산적 폭로전의 중단과 생산적 대선으로의 복귀를 촉구했던 것이다.
관련 증거와 함께 고발된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는 건 법치주의의 당연한 실천이다. 하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검찰을 지휘하고 사면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큰 차원의 법리에서 보면 과거 정치권의 비자금 문제의 사법적 해결은 5·6공비자금 단죄로 일단락된 감이 없지 않다. 앞서 대통령은 비자금관련 재벌들을 특별사면한 바 있고 대선후의 전·노씨 사면마저 거론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래서 비자금 문제란 이제 정치개혁입법을 통한 정치적 해결이라는 「미래형 과제」의 단계로 와 있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이 그동안 신한국당지도부의 수사촉구에도 언제나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자세를 일관한 것에 대해 일반여론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처럼 복합적이면서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던 사안을 검찰이 짐을 대신 짊어지고 유보결단을 내린 것이기에 문제는 오히려 이제부터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결정이 몰고올 사법적 파급보다는 정치적 지각변동과 그 수습에 우리는 더욱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여론의 지지도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집권 여당대선후보의 대선 승부수가 검찰에 의해 일단 좌절됐을 때의 혼란과 파동을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적 난제를 더이상 검찰에 떠맡겨서는 안될 것이다. 정치권과 통치권이 지금부터 국가적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해 눈앞에 닥친 경제위기와 민심불안 해소는 물론 대선을 생산적으로 치러 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치권은 이번 결정이 비자금의혹에 면죄부를 준 것이 결코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검찰도 아무리 검찰의 중립성확보를 위하려는 명분이라지만 또 다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사태는 없어야 겠다. 그런 의미에서 비자금수사가 사실상 끝난게 아니라 유보되었다는 발표에도 유의한다. 검찰 스스로도 이번 결정과정에서 「위기를 기회」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걸 증명하며 본연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것은 오직 검찰이 수행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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