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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묘소 용인 능원(차따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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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묘소 용인 능원(차따라:24)

입력
1997.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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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장려 통해 차문화 기틀 마련/고려귀족 전유물 차를 제례의식 통해 백성의 생활속으로 스며들도록 일조/‘돌솥에 차 끓이며’ 차시 유명「나라에 보답할 힘도 없는 늙은 서생/ 차 마시는 버릇에 세상을 잊었네/ 그윽한 집에 홀로 누운 눈보라치는 밤/ 돌솥의 찻물 끓는 소리를 즐겨 듣나니」(보국무효로서생 끽다성벽무세정 유재독와풍설야 애청석정송풍성)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유명한 차시 「돌솥에 차 끓이며」(석정전다)이다. 고려의 충절혼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차인의 한 사람이다. 관혼상제 의식에 차를 올리도록 권장, 격조높은 차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게 바로 그였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전성기였다. 소비가 늘어 생산이 뒤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 계층에서는 지탄을 받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차모임이 잇따라 조정에서 낭비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고려말기로 갈 수록 두드러졌다. 포은은 바로 이런 가운데 정치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법질서와 국운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는다. 개성에 5부학당을, 지방에 향교를 세워 성리학을 바탕으로 윤리와 도덕성 회복에 힘쓴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지만 그 이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천인합일의 사상으로 성리학 이론의 기초를 세운다. 목은 이색(1328∼1396)은 『포은이 이를 논할 때는 횡설수설이라도 이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평했다. 「동방이학의 시조, 또는 「예학의 시조」로 추앙되기에 충분한 경지였다.

특히 그가 관혼상제에 주자가례를 접목해 장려한 차례는 고려가 망한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때 특수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차는 제례의식인 차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속에 스며 들었다.

그는 1392년 56세의 나이로 선죽교에서 비명에 쓰러진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그의 주검을 송악산 스님들이 풍덕군에 묻는다. 14년 뒤인 조선 태종 6년(1406), 그의 유골은 고향 영천으로 가는 면례(묘를 옮기는 일)길에 올랐다. 상여가 경기 용인군 수지면 죽재를 지날 때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어 명정이 날려 갔다. 바람이 멎기를 기다려 상엿꾼들이 다시 상여를 옮기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 지관이 명정이 날아가 꽂힌 산 중턱을 가리키며 그곳에 유골을 모시자고 했다. 그 순간 상여가 떨어졌다. 이런 사연으로 포은은 고향 영천에 묻히지 못하고 용인 3대 길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문수산 기슭에 묻혔다.

그의 유택이 들어 서면서 이곳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우선 무덤을 지키기 위해 후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선조 9년(1567년) 무덤에서 1.5㎞ 정도 떨어진 곳에 그를 기리는 충렬서원이 세워졌다. 「명문 사학」으로 손꼽힌 충렬서원은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원래 여포촌으로 불리던 마을 이름까지 포은 때문에 모현면 능원리로 바뀌었다. 지금도 능골이라고 불리는 이 일대는 대원군이 서원을 폐쇄할 때까지 한양에서 공부하러 온 대갓집 자제들로 북적거렸다.

포은의 유택을 찾는 길은 어렵지 않다. 중부고속도로 경안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용인쪽 국도로 접어든다. 외국어대학 용인분교 네거리에서 우회전, 용인 에버랜드 후문쪽을 지나 12㎞쯤 가면 오른쪽에 효자비각, 왼쪽에 「포은선생 묘소」라는 입간판과 영모교가 나온다. 영모교 왼쪽에는 86년 후손들이 「이몸이 죽고 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가 음각된 시비를 세웠다. 다리를 건너 500m가량 올라 가면 신도비각이 나오고 바로 그 뒷편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된 영모재와 묘소가 있다.

쌍유혈에 자리잡은 포은의 묘소는 좌청룡·우백호에 감싸여 있다. 눈앞이 탁 트여 있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은 터라는 느낌을 받는다. 왕릉에나 허용된다는 담이 둘러서 있고 「교려수중하시중정몽주지묘」라고 음각된 비석은 고색이 창연하다. 뒷면의 「불사이성(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 네글자가 눈길을 끈다.

묘소 바로 아래 영모재에는 「충절과 정의가 천년을 드높으니/ 내 평생 크게 존경해 따르리라」(절의천추고 평생아경중)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숙종이 직접 짓고 썼다.

「돌솥에는 물이 끓고/ 풍로의 불은 붉게 달아 올랐다./ 감과 이는 천지간에 쓰이니/ 이야말로 그 뜻이 끝이 없구나」(석정탕초비 풍로화발홍 감리천지용 즉차의무궁) 「독역」(주역을 읽음)이라는 포은의 시다. 국운이 기울어 가는 가운데 차를 끓이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살피고 자신의 절개를 다졌다.

8괘 중의 감괘는 물을, 이괘는 불을 뜻한다. 돌솥을 사이에 두고 아래에서는 불이 타 오르고 위에서는 찻물이 끓는 것을 보면서 괘를 생각한다. 불이 있어야 물을 끓일 수 있다. 그러나 물과 불이 있어도 솥이 없다면 찻물은 끊일 수 없다. 차 한잔을 알맞게 끓이기 위한 불과 물, 솥의 균형을 눈여겨 살피면서 기울어 가는 고려의 국운을 생각했던 것일까.<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차빛깔 잘 내려면 찻잔 선택이 중요/잎차 마실땐 순백자/혼탁한 가루차는 청자나 천목차완 등 검은그릇/초보자는 백자 바람직

차를 마실 때 어떤 그릇을 쓰는 게 좋은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우리 잎차의 경우에는 맑은 차를 제일 좋은 것으로 치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백자 찻잔에서 출발할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백자 찻잔을 제대로 고르기도 쉽지 않다. 백자에도 아무런 잡색이 섞이지 않은 순백자, 우윳빛이 도는 유백자, 약간 푸른빛이 도는 남백자, 또는 청백자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잎차를 마실 때는 순백자를 최상으로 쳤다.

쪽빛이 도는 청백자는 찻빛을 흐린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 차 본래의 빛을 즐겨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애썼던 것이다.

한편 잎차보다 이른 시기에 유행한 가루차를 마실 때는 또 달랐다. 우리 잎차보다 혼탁한 가루차는 녹색의 고운 거품을 낸다.

옛 어른들은 이 녹색의 빛을 더욱 도와주는 그릇을 좋은 찻잔으로 여겼다. 「찻잔이 푸르면 찻빛을 돕고, 희면 찻빛이 붉어지고, 누른 빛이면 차가 자색을 띠게 되고, 갈색이면 찻빛이 검어진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루차가 유행한 중국의 송대나 고려시대에 청자와 같은 찻잔이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찻빛을 살리기 위해 실로 여러가지로 애를 썼고 그런 노력들이 차문화를 풍성하게 했다.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 오늘날 일본에서는 찻잎을 푸르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 검은 천을 차나무 위에 둘러 햇빛을 가려주기도 하고 심지어 검은 찻잔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 나오는 고려시대의 금화오잔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찻잔이다. 또 가루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하는 차그릇인 검은 빛의 천목 차완도 같은 계열이다.

이처럼 옛어른들은 검은 그릇의 빛깔과 녹색 가루차의 강렬한 대비, 또는 비취빛 청자와 녹색 가루차의 은은한 조화 등을 즐기며 차 한잔에서도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차그릇을 골라 썼다.

차 빛깔 하나만 잘 내어도 차맛과 향기의 절반이 저절로 따라 온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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