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후 얼마간의 해방공간은 시위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지는 무정부상태의 나날이었다. 군중시위가 봄철에 더욱 극성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식량부족이 그 원인이었다. 배고픈 민중에게는 우선 먹을 것이 급했다. ◆이승만정권이 성립되기 전 먹을것을 마련하는 일은 미군정청의 책임이었다. 본국정부가 주는 예산은 충분치 않고, 시위는 날이 갈수록 사나워지고, 궁지에 몰린 미군정청의 한 담당장교가 상황보고를 하러 간 한국인 관리에게 짜증을 냈다. 『한국사람들은 어째서 쌀만 먹으려고 하는가. 사과도 먹고 고기도 먹으면 좋지 않은가』 ◆이 말이 전해지자, 「그 지경으로 실정에 어두운 자들이 무슨 군정을 하겠다고 버티고 있느냐」며 여론이 벌집 쑤셔 놓은 듯 소란했다. 이 일화는 그 뒤로도 두고두고 미국인의 천진한 대한관을 대변하는 실례로 회자돼 왔다. 요즘 미국사람들의 북한지원에서도 그런 자기중심적 시각은 여전한 것같이 느껴진다. ◆작년에 강릉에 침투했던 잠수함에서 미국교회가 보낸 쇠고기 통조림 표지가 발견된 것도 그 하나의 보기가 될 수 있다. 남북한이 어떻게 대치하고 있고, 북한정권이 얼마나 호전적 집단인지, 또 그들이 얼마나 약속을 우습게 아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미국자선단체들은 그저 굶어 죽게 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구호식량을 모아 보내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 할 도리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무고한 남한 주민을 살상하는 무장공비의 전투용 보급품으로 둔갑하리라고는 상상이 안되는 것이다. 한미공조의 틈새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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