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비 온다” 몇날 몇일 기다려/즉석에서 읊은 ‘등한강루’ 네귀절/“역시 조선의 시” 무릎치며 기뻐해/‘황화집’의 장녕과는 끝내 상봉불발사오싱(소흥)에서 재심을 끝낸 최부는 비로소 살아서 고국땅을 다시 밟게 되는구나 하는 안도의 심정을 느꼈으리라. 최부의 의연한 기개와 깊고 넓은 학문이 모두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최부 일행은 사오싱을 떠난 이틀후 2월6일 저장성 성도 항저우(항주)에 도착한다. 치안탕(전당)강의 유유한 흐름이 펼쳐지고 강건너 에메랄드 빛 산아래 970년, 처음 세워진 육화탑이 자태를 드러낸다.
빛바랜 주황색의 8각 13층 탑신이 쪽빛 강물, 푸르름 짙은 산용과 어우러져 피안의 세계처럼 환상적이었다. 항저우는 9세기 오월국, 그리고 12, 13세기 남송의 수도로 번영을 거듭했다. 원제국 때 마르코 폴로는 4번이나 항저우를 찾았고 1291년 1월 마지막 귀국길에도 지나갔다. 그는 「동방견문록」에서 항저우는 세계 제일의 아름답고 번화한 도시라고 서양에 처음 소개한 것이다.
최부가 항저우에 도착하자 진수태감 장칭(장경)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김완지 조혜 이사철 이변 이견기 등의 이름을 들며 벼슬을 물어왔다. 이들은 1450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절 한림원시강(정6품관) 니첸(예겸)을 접대하고 시를 화답한 조선고관들이다. 니첸은 귀국 후 조선기행 시문집을 엮어 「요해편(4권)」이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니첸은 1439년 과거에서 탐화(제3등)로 합격한 당대 굴지의 문장가이며 이에 맞서 니첸을 능가하는 시의 세계를 펼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이 이 책을 통해 당시 중국에게 알려져 크게 감명을 준 것이다. 「요해편」은 조선과 명간의 최초의 국제시집이며 한중문화교류를 기리는 귀한 책으로 지금 중국 북경도서관과 국내에 1책씩 남아 있다. 장칭은 「요해편」을 읽고 최부에게 물은 것이리라.
조선과 명시대만 해도 시를 통해 보다 풍요한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장칭이 조선시를 통해 얻은 좋은 이미지 때문에 최부에게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최부는 은연중 선인들의 문기의 덕을 본 셈이다. 니첸이 조선을 다녀간 후 1633년 명나라 마지막 사절 청룽(정룡) 때까지 약 2세기 동안 명나라 사절이 올 때마다 시집을 엮어 「황화집」이란 우호 시집을 펴냈다. 「황화집」은 원래 외교 정치의 산물이지만 시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두 나라의 친선을 두텁게 하는 한편 조선의 마음과 미를 중국에 전달했고 화이관념의 그들에게 문명국 조선을 실감시킨 것이다.
2월8일 최부는 항저우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을 아쉽게도 못 만났다. 왕제와 천량(진량)이 찾아와 『「황화집」을 지은 장닝(장녕)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장닝은 1460년 조선을 방문했다. 「세조실록」은 「장닝은 주는 선물을 마다해 사람들이 칭찬했다」고 그의 깨끗한 사람됨을 적고 있다. 최부는 즉석에서 「황화집」에 나오는 「등한강루, 오율십수(5자씩 10줄의 시 10수)」중 첫수의 네 귀절을 읊었다.
「화사한 봄빛 파란 배에 넘실거리고/ 흰 새우는 모래섬 저편으로 해가 기운다/ 아득한 수평 위에 하늘은 닿아/ 땅도 어우러져 두둥실 춤을 추네(광요청작방 영락백구주망 원천의진 릉허지욕부)」. 봄날 한강 뱃놀이를 묘사한 대구가 잘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서경시다. 최부가 읊은 시를 듣고 두 사람은 몹시 기뻐했다. 더욱 왕제는 장닝의 조카, 천량은 장닝을 따라 조선을 다녀왔단다. 장닝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항저우 성에서 동쪽 약 100리의 고향 자싱부 하이옌(가여부 해염현)에 살고 있는데 얼마전 볼일로 항저우에 왔다가 표류한 조선선비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몇날을 기다리다 바로 전날 돌아갔다. 단 하루 때문에 이 극적인 해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부와 장닝이 항저우에서 상봉했더라면 얼마나 많은 얘기가 오갔을까. 「표해록」의 사연도 더욱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만남의 아쉬움이 나그네를 붙잡는 것 같아 차마 발길을 떼기 어려웠다.<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항저우·항주에서)>박태근>
◎다시 새겨보는 표해록의 가치/일선 ‘당토행정기’로 18세기에 번역·출간/명나라 중엽 사회사연구에 귀중한 문헌
중국불교사를 전공한 본인은 첫 저서로 「사쿠히코 입명기연구 경도법장관」을 펴냈다. 이 책은 그의 일기 「입명기」를 복원, 연구한 것이다. 사쿠히코의 입명보다 약 50년 앞선 1488년 윤 1월3일 제주도로 출장간 최부는 부보를 받고 고향 나주를 향해 출발했다. 폭풍을 만나 표류해 중국 저장(절강)성 동남안에 표착한 최부 일행은 닝보(녕파)로 호송된다. 그 뒤 항저우(항주), 대운하를 경유해 베이징(북경)에 이른 뒤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의주에 도착한 150여일간의 기록이 「표해록」이다.
최부는 1504년 사화로 옥사하지만 「표해록」은 명나라 중엽 사회사 연구의 귀중한 문헌이다. 「표해록」은 에도(강호)시대의 유학자 기요타(청전)가 『이역 땅의 체험이 흥미롭다』고 해서 자신의 견해를 붙여 「당토행정기」라는 제목으로 4책을 1769년 교토의 책방에서 펴냈다. 이에 대한 논문을 「간다 기이치로(신전희일랑)박사 추도중국학논집」에 「당토행정기담의」의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
84년 5월8일 동국대 대학원장실로 이용범박사를 방문했을 때 서가에서 최부 저, 최기홍 역 「표해록」(79년 9월 간행)을 보고 곧 이박사의 소개로 다음날 호텔로 찾아온 최기홍씨로부터 1책을 기증받았다. 다음날인 10일 홍윤식 교수의 안내로 나주로 가 최씨 후손들과 함께 최부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 것은 내 생애에서 매우 귀중한 체험이었다. 95년 여름 베이징대 거쩐자 교수 주최 「최부 표해록연구」 출판학술좌담회에 초청받아 최기홍씨, 존 메스킬씨와 재회했을 때 본인이 소장한 「당토행정기」를 최기홍씨에게 기증한 일은 이 모임에서 가장 기억되는 일이었다. 최부가 사화의 와중에 말려들어 비명으로 가신 493년뒤 한국일보사에서 그의 업적을 다루게 된 것은 「표해록」의 기록이 조선시대사와 명대사 중엽규명에 귀중한 문헌이 되기 때문이리라.<마키타 다이료(목전체량·전 교토대 교수)>마키타>
◎표해록 초/“몸을 상하게 하였으니 나는 불효자”… “당신은 경우가 다르니 상심마시오”
2월6일=자이용(적용)과 우리는 비때문에 하루 쉰 것을 제외하고 밤을 새워 천여리를 달려왔다. 그런데도 진수태감 장칭(장경)은 늦었다는 죄목으로 자이용을 곤장으로 문책했다.
2월7일=저녁에 안찰제조학교 부사 정대인이 나에게 물었다.
―역의 위수는 어떤 사물을 의존하고 있소.
『하출도 낙출서가 나오자 성인은 그것을 본받은 것이오』
―하출도와 낙출서가 아니면 역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이오.
『천하만물에는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소. 비록 토끼나 팔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역으로 그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 것이오』 말이 끝나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는가 싶더니 『당신은 참으로 독서를 많이 한 선비같소. 이 지방 사람들은 정말이지 무식하기 짝이 없소』라며 감탄했다.
2월9일=리지에(이절)가 찾아와 내 옷이 남루한데다 얼굴에 때가 많이 낀 것을 보고 『여기 사람들은 치장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들을 보면 모두 슬픈 미소를 지을 것이오. 조선사람들이 다 그런 줄로 여길 것이니 몸을 좀 씻는 게 좋겠소』라고 했다. 또 내 살갗이 벗겨지고 발톱이 다 빠진 것을 가리키면서 동정했다. 나는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훼손한다거나 상하지 않게 함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몸을 상하게 하였으니 정말 불효자요』라고 하자, 리지에는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지만 당신은 경우가 다르오. 부득이한 일로 상한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라고 위로했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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