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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사회 병든 인간(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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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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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다소 이상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아주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간 동양 학생 하나가 여름방학 때 어느 시골의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자리를 하나 얻어 그 곳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학생이 돌보게 된 병동의 병실에는 정신분열증,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정신병환자는 예외없이 눈을 좀 이상하게 뜨는 사람들이다. 그중 한 환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나폴레옹이란 말이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일단은 그 자리가 조용하였다.

이윽고 한 환자가 나폴레옹을 사칭하고 나온 그 인간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위엄있는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느님이야』 그 말에 맞서서 나설만한 용기있는 사람은 한동안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누가 감히 『나는 하느님이야』하는 자 앞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엄숙한 분위기를 깨면서 당당히 한마디 하는 사나이가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 남성은 신성모독을 감행한 그 환자를 노려보면서 매우 화가 난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이놈아, 누가 너를 하느님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나야, 이놈아, 내가 너를 하느님으로 만들어 준 것이야』 아마도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의 무신론을 수정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돌아버린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애교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 우리들로 하여금 미소짓게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최근에 서른여섯살 난 한 사나이는 그 나이가 되기까지 장가 못간 사실이 원망스러워 술을 마시고 홧김에 불을 다섯 군데나 질렀다고 하는데 그 뉴스에 대한 코멘트를 라디오에서 내가 이렇게 하였다. 『여보시오. 이 세상에 장가 못간 사람이 당신 뿐인 줄 아오. 이제 겨우 서른여섯에 그게 무슨 짓이오. 장가 못간 자들이 모두 홧김에 불을 지르면 세상이 불바다가 될 것 아니오』 칠십이 다 되도록 장가 한번 못간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따위의 정신이상자들에게는 동정이 간다.

그러나 돈 때문에 신분이 대학교수인 자가 자기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그 사실을 강도·살인으로 위장하고, 자기가 죽인 아버지의 시체 옆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정신이상은 치유의 길이 전혀 없을 것만 같다. 보험금을 타 먹기 위해 남편에게 소주에다 청산가리를 타 먹이는 아내의 정신병도 치유불능이 아니겠는가.

최근에 우리 모두를 절망과 통탄의 낭떠러지로 몰고 갔던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살해사건의 전모를 알고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음을 절감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20대의 젊은 여자, 집안도 좋고 인물도 잘 생긴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뱃속에 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런 사람들의 정신병은 하도 뿌리가 깊어서 그 원인을 찾아내기도 어렵고, 그런 병을 고치는 약은 아직도 발명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런 여자가 범죄의 과정에서 줄곧 뱃속에 간직하고 있던 어린 생명이 며칠전에 세상 빛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건강한 딸 하나가 박나리의 목을 졸라 죽인 그 여인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은 것이다. 하기야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의 후예도 죽지 않고 살아서 번창하는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을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 어린 딸의 앞날에는 험한 산, 깊은 물, 그리고 독사와 전갈이 우글우글하는 광야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정치판을 보아도 장터를 보아도 서당 안을 들여다 보아도 모두가 제 정신은 아닌 것만 같다. 대통령이 되면 뭘 하고, 대기업의 회장자리를 지키면 뭘하고,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면 뭘 하겠다는 것인가. 병든 사회와 병든 인간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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