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1821∼1861)신부는 한국인으로 두번째 천주교 사제가 된 인물이다. 첫 사제는 김대건 신부다. 둘은 소년시절에 함께 뽑혀 중국 땅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청년기에 이르도록 교육 받았다. 먼저 서품된 김 신부는 고국에 돌아와 「피의 순교」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고, 뒤이어 돌아온 최 신부는 산골짜기에 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박해받는 공동체를 돌보다가 「땀의 순교」를 하게 된다.최 신부가 중국에서 신학교육을 받는 동안 그 부모와 형제들에게 일어난 얘기가 전해온다. 맏아들을 유학보낸 「죄」로 이리저리 쫓기며 살던 가족들은 부모와 다섯 형제가 한꺼번에 체포돼 옥살이를 한다. 15세에서 젖먹이까지 5형제 중 막내 젖먹이는 젖이 없어 굶어죽고, 4형제는 풀려나 구걸로 연명한다. 이들이 문전마다 동냥한 밥과 떡을 사식으로 어머니에게 넣어준 일화는 눈물겹다.
1839년 9월11일, 아버지 최경환은 고문을 못이기고 옥사한다. 다음날인 12일은 어머니 이성례가 참수 처형되기로 예정된 날이다. 4형제는 구걸해서 모은 돈을 싸들고 다음날 형장에서 칼을 휘두를 휘겡이를 수소문해서 찾아간다.
『내일 저희들 어머니의 형을 집행할 때 날을 날카롭게 해서 한 칼에 베이도록 해주십시오.』
휘겡이는 어린 형제들의 「뇌물」을 받고, 칼을 열심히 갈았다. 이튿날 형장에서 구경꾼들 틈에 끼었던 형제들은 「뇌물」의 효험을 확인하고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슬픈 뇌물」일지도 모를 이 이야기의 무대는 서울 용산구 신계동의, 지금 감리교회 자리인 당고개다.
뇌물은 본래 효험이 확실한 것이다. 중국에는 「천금이면 죽지 않고(천금불사), 백금이면 벌받지 않는다(백금불형)」는 말이 있다. 요즘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비슷한 말이다. 최양업 신부의 어린 동생들은 불사나 불형까지는 이르게 하지 못했으나 단 한 순간일망정 고통을 줄였다는 자기위안은 얻은 셈이다.
뇌물 이야기, 그것도 슬픈 옛 이야기를 들춰낸 까닭은 뇌물이 상징하는 부패가 지금 이 곳의 「시대적 명제」이기 때문이다. 4형제와 휘겡이가 주고 받은 것은 뇌물도 부패도 아니요, 다만 인정일 뿐이지만, 우리 사회의 부패가 이미 우리들 삶의 한 양식(modus operandi)이 되어 있다는 점을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관행이고, 관행이니까 괜찮다는 우리들의 의식구조다.
마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부패라운드」로 주목받아온 뇌물방지협약을 성안, 올 연말 안에 각료급회의를 열어 서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협약은 외국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면 형사처벌이요, 뇌물로 얻은 이익은 전액 몰수요, 뇌물수수는 당사국 외에 제3국도 기소할 수 있다는 등 매우 강력한 내용이다. 이들 기준에 맞추고 국제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자면 우리 사회의 체제 개혁은 아직도 한참 멀었다. 정치권에 의해 까닭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 「부패방지법」제정부터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패는 더 이상 안된다」는 각성이 공유돼야 한다. 혹시라도 정치자금의 부스러기에서 소외되지나 않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자세로 임하는 자리가 국회 정치개혁특위라면 개혁은 애초부터 물건너 갔다.
검찰의 손에 넘겨진, 그래서 홍사덕 장관이 걱정한 대로 「검찰의 정치개입」이 불가피하게 된 김대중 대선후보의 비자금 의혹도 그 본질은 우리 정치의 개혁이 어디서부터 착수되고 추진되어야 하는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온 제도와 관행이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발되고, 그로써 온 세상에 표면화한 비자금 의혹은 그것이 실체가 있는지, 있다면 뇌물인지 축재인지, 혹은 정치헌금일 뿐인지 가려져야 할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그 작업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온 제도와 관행을 건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는 「혁명적 과업」이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적 과업」이 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대선을 두달 앞두고 인기도 1위를 달리는 후보를 일거에 저격하는 전략·전술적 의도를 감출 길이 없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털어놓는 대고백이 있어야 그나마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제도와 관행을 깨는 것은 어느 일방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법이 떳떳해야 한다. 검찰의 수사도 마찬가지다.<심의실장>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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