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관대한 사회인식따라 신체·정신·성적으로 학대받고 격리보호 필요한 아동이 4만명/사랑없는 매는 화풀이일뿐 가출·비행 등 사회적 일탈을 낳고 ‘폭력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집에 안 돌아갈래요. 아빠가 찾지 못하는 데로 데려다 주세요』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한국위원회 이배근 조정관은 가녀린 이 한마디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달려간 텅빈 가정집, 낮은 신음을 내며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아이를 황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자전거 체인으로 맞은 듯한 상처에 천이 엉겨붙어 옷도 벗기기 어려웠다. 서둘러 응급치료를 받은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여섯살바기 남자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는 「집에 안 간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아버지한테 그토록 얻어맞은 이유는 단 한가지, 가출한 어머니와 빼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대받은 아동이라 할지라도 친권자의 동의가 없으면 임의로 격리보호, 수용을 할 수 없게끔 한 우리 법제도 앞에서 이조정관은 그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아이는 짧은 해방과 자유를 끝내고 다시 홀아버지의 모진 욕설과 매질이 기다리는 집으로 인계됐다.
4년 전 영국 런던에서 연수생활을 한 전모(41)씨의 체험. 어느날 아동학대 관련 단체에서 직원 2명이 찾아와 확인할 것이 있다며 아이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아이 엉덩이에 난 푸른 점을 살펴보더니 아이를 때린 이유가 뭐냐고 다그쳤다. 기가 막힌 전씨는 한국인 특유의 몽고반점이라고 설명했으나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병원에 이들을 동행, 의사로부터 어렵게 확인받은 후 문제가 해결됐다. 아이의 유치원 교사가 신고한 것이었다.
두가지 사례는 아동학대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대처방식을 극명하게 대비시켜준다.
지나친 어린이 과보호만이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아동학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와 가족의 묵인 하에 죄책감이나 책임감없이 무의식적으로 저질러진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아동학대의 정도는 생각보다 심하다.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는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로 인해 시급히 수용시설에 격리보호되어야 할 어린이가 4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10∼12월 전국 11개 지역 초등학생 4,298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이웃사랑회의 「아동학대실태조사」 결과. 아동학대가 일부 문제가정의 차원을 벗어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조사대상 아동의 72.8%가 학대를 경험했고, 39.5%가 한달 2, 3회 이상의 상습적 체벌을, 31.9%가 심한 구타를, 37.7%가 성적 학대를, 50.1%가 방임상태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폭행 종류로는 손과 발을 이용한 행위(70.0%) 외에 몽둥이 체벌(24.4%), 담뱃불 지지기(2.5%), 팔다리 묶임(1.9%), 흉기위협(1.2%) 등의 순이었다.
이 단체의 이호균 복지사업부장의 말. 『이런 통계를 제시하면 많은 부모들이 놀라기보다는 「자식을 가르치다 보면 한두번 매를 들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미국은 학대를 당하는 아동들이 전체의 25%, 일본은 35%로 우리나라에 비해 2, 3배 낮다. 유교문화, 가부장 중심의 수직적 가족질서 등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우리 아이들이 외국 아이들에 비해 2, 3배 이상 못된 아이들은 아니지 않느냐』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신체적·정신적 능력이 없는 아동학대의 후유증과 부작용은 크고 평생을 갈 수 있다. 『자주 매를 맞거나 방임상태가 계속되면 발육부진, 성장장애, 심한 신체적 변형에 심지어는 사망하는 수도 있다. 학대받는 아동의 3분의 1이 심각한 학습부진과 지능·정서장애를 나타낸다는 보고도 있다. 이러한 신체적·정신적 상처와 후유증은 어린이의 나머지 일생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데 아동학대의 심각성이 있다』 서울대학병원 홍강의 소아정신과장의 지적이다.
아동학대는 또 피해자의 가출, 비행 등 사회적 일탈행위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체 가출 청소년의 36.9%, 특히 여자의 53.4%가 부모의 학대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로 가출했다. 또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중 81%가 폭력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대받은 어린이는 커서도 학대를 일삼는 어른이 되는 「폭력의 대물림」현상이 발생한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조사결과들은 결국 아동학대가 어린이들만의 문제도, 가정내의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동학대는 흔히 청소년기 학교폭력, 성인기의 사회폭력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아동학대와 맞서는 일은 단순한 온정주의도, 박애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미래를 건강하게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이자 노력이다.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에 멍이 들면 우리 미래에도 멍이 들 수 밖에 없다』 서울 시립아동상담소 이영희 소장의 말이다.<황동일 기자>황동일>
◎어린이 눈높이서 학대기준 마련 시급
아동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훈육인가 학대인가? 매를 드는 체벌은 교육적인가 비교육적인가? 자녀가 부모의 부속물이라는 인식은 합당한가? 우리의 사회통념상 아동학대의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체벌이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가정과 사회 전반에 대체로 용인돼 있기 때문이다. 설령 체벌의 정도가 심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이를 수용하려는 경향이 짙다. 더구나 학대하는 당사자가 스스로 『내 아이 내가 때리는데…』라며 행위 자체를 인정치 않는 관습도 아동학대에 대한 정의내리기를 어렵게 한다.
흔히 아동학대는 신체적인 부상을 입히거나 구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동입장에서의 「학대」개념은 이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예전의 대가족 제도 아래서 아동에 대한 집안 어른의 체벌은 훈육의 차원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핵가족화 하면서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나 맞벌이 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방임 등 부모 입장에서는 가볍게 생각되는 부분도 아동에게는 학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의 개념은 철저히 아동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아동이 공감하는 훈육목적의 체벌은 효과가 있지만, 공감이 결여된 상태의 체벌은 수위에 상관없이 학대로 이해된다』고 강조했다.
아동학대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였던 한국이웃사랑회는 국내 처음으로 아동에게 위해를 가하는 「신체적 학대」와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정신적 학대」, 성폭력사건의 30%에 해당하는 「어린이 성폭행」 등으로 아동학대의 범위를 규정했다. 이같은 아동학대의 기준을 서구 선진국처럼 명확히 법제화하거나 아동인권의 보호차원에서 사회적인 감시와 통제를 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점이 뒤따른다. 하지만 명백한 폭행에 해당하는 아동학대에 대해서는 이미 법안이 준비돼 있고 아동권리의 보호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 훈육을 위한 체벌과 아동학대 사이에도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모선영 사무국장은 『체벌이 교육으로 용인되고 방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아동학대의 양상은 곧잘 은폐되며 이 과정에서 아동만 희생양이 되어 간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아동학대의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고 말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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