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에도 포도나무는 여전히 새의 알 같은 열매를…한강에서 멀지 않은 내가 세들어 사는 집 앞마당에 포도나무가 잠자리 날개 같은 여리디여린 포도알을 매달기 시작했다. 며칠 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포도알들이 발에 밟혀 으깨어져 있는 것이 불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중 깨끗해보이는 포도알을 주워들고 발길을 돌려 한강에 산책하러 나갔다. 밤강에 앉아 있으려니, 조금 몸이 떨려왔고, 뒤채는 물결 속에서 흰빛이 떠올랐다 가라앉곤 하였다. 만월의 빛이었다.
한강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강이지만,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신태인에 하천강이 있었다. 아버지가 철교를 건너다가 기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뛰어내린 적이 있는 기억 속의 강. 밤에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포도알을 밤의 어둠 속에 띄워보냈다. 어린 시절, 여인들이 밤에 몰래 몸을 씻곤 하던 고향의 강가에서 퍼지던 향기를 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포도알 하나에서 충만했던 세계로 돌아가고픈 희망을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벽을 훌쩍 넘긴 시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세들어 사는 집 마당에 잎을 드리우고 있는 포도나무를 생각한다. 한번도 탐스러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바닥에 투명한 알을 떨구는 포도나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으깨어진다 할지라도, 삶이 조금은 팍팍하다 할지라도, 내일 아침에도 포도나무는 여전히 새의 알 같은 열매를 맺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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