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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타려면/우종천 서울대 교수·물리학과(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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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타려면/우종천 서울대 교수·물리학과(아침을 열며)

입력
1997.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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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때쯤 되면 올해 노벨상 수상자는 누구일까가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서양사람 이름이 발표되면 하루, 이틀 떠들썩하다가는 곧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는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 야구팀에게 돈벌이를 해주는 일에도 나라가 떠들썩하니까 말이다. 운동은 잘 하는데 노벨상은 왜 못 탈까?1973년 노벨상 수상자이고 현재 일본 쓰꾸바대학 총장인 에사키 박사는 95년 내한강연에서 「노벨상은 창의력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연구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인 33세때 소니(SONY)사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젊었을 때 일본을 떠나 미국 IBM연구소로 갔고, 노벨상은 미국에서 받았다. 그래서 일본은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예를 절반 밖에 받지 못했다. 그가 미국으로 간 이유는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가 창조적인 그의 활동을 방해했고, 권위적인 보수성이 젊은이의 분방한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에 에사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조셉슨의 경우를 보자. 그는 대학원 학생이던 22세때 발표한 논문으로 노벨상을 탔는데,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된 데는 지도교수였던 피파드의 공이 컸다. 피파드교수는 이 학생이 써 가지고 온 논문을 조셉슨 혼자만의 이름으로 학술지에 발표하게 했고, 그 논문은 공동 수상자는 3명 이하라는 노벨상 규정에 맞아 조셉슨이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문을 쓰는데 지도교수의 도움이 없었을 리 없지만, 이를 양보한 교수의 인격이 제자를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경우는 특출나면 질시하고 끌어내리는 풍토가 노벨상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다른 경우는 교수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희생하면서까지 제자를 밀어주어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나 연구 환경은 어떠한가. 요즈음 특수목적 고등학교 학부형들이 자녀를 집단 자퇴 시킨다고 시끄럽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야 한다면서, 영재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것이 과학고등학교이다. 그런데 교육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입시제도를 급작스럽게 바꾸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물론 노벨상이 운동선수가 금메달 따는 것처럼 훈련시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급작스럽게 바뀌는 제도, 획일성이 강요되는 환경이 창의성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최근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해서 과기처 주도 아래 창의적인 연구과제를 뽑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러한 연구 투자는 계속 확장되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투자 및 관리의 방식이다. 연구비는 연구를 위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사용토록 하면 되는데,관료적인 행정이 효율성을 저하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때는 평가라는 이름으로 연구비 수혜자가 범죄 피의자처럼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연구원 월급은 각자가 연구비를 벌어와서 갖고 가라는 식의 제도도 있다. 또 최근에는 부도 기업이 늘어나면서 연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외국에서 들여온 연구장비가 차압이 된다. 그러면 이 장비가 방치되어 녹슬어 가는 것도 문제지만, 장비와 함께 녹슬어 가는 청춘과 두뇌가 아깝다.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똑똑한 제자를 키워줄 수 있는 아량, 서로를 믿고 감싸주어 팀 플레이를 이룰 수 있는 풍토, 이런 분위기가 가장 이상적인 연구환경이 아닐까 한다. 요즈음 금메달을 따가지고 오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우선 체력면에서는 선진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노벨상도 연구활동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연구원들의 정신적 영양상태가 선진국 수준이 되었을 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포용성 있고 안정된 환경을 바라는 것은 연구 분위기만이 아닐 것이다. 나라 정치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걸친 바람일 것이다. 진실을 왜곡하고, 남을 헐뜯고, 한번 결정된 것을 되돌리자고 하는 대선의 분위기는 이와 거리가 있다. 진정으로 안정된 교육과 연구 풍토의 정착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대선 후보는 과연 누구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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