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 비자금사건이 터질 때마다 도마위에 오르는 것이 바로 금융실명제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파동 때도 그랬고 김현철씨 비자금사건 때에도 그랬다.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의 비자금설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그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금융실명제는 또다시 존폐논란을 맞고 있다.「금융실명제는 검은 돈의 퇴치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비자금은 버젓이 활개친다. 따라서 실명제는 존재이유를 상실했다」 이것이 바로 요즘 고개를 들고 있는 금융실명제 무용론의 삼단논법이다.
이같은 주장의 진원지를 따져들어가면 가장 먼저 걸리는 곳이 정치권이다. 여당은 스스로 문민정부 개혁의 꽃으로 찬양하던 실명제 이념을 정강정책에서 삭제하려했고 일부 야당은 아예 폐지법률안까지 제출할 움직임이다. 재계에서도 실명제 퇴장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선 뚜렷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뇌물, 비자금, 리베이트, 정치자금 등 과거 음성거래의 수혜자들이고 따라서 금융실명제 실시로 매우 불편을 느끼는 그룹들이란 사실이다. 국민의 번거러움이 아니라 바로 자산들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반실명제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명제의 허점을 메우기 위한 정치자금법 돈세탁방지법 개정작업이 정치권에서 왜 미뤄지고 있는 지도 짐작할만 하다.
실명제가 검은돈 척결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나 비자금은 「실명제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지 「실명제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명제가 최소한 음성거래에 불편을 주고 그래서 그 규모가 조금이라도 줄었다면 존재이유는 충분하다.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도 실명제가 아니었다면 그저 「야사」에나 묻혀져 지나갔을지 모른다.
투명거래와 공평과세가 실현되려면 실명제는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강화의 대상이다. 음성거래의 수혜자들은 어쩌면 국민들이 비자금에 느끼는 분노의 화살을 실명제로 돌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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