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 극장가는 팬들로 인산인해/유럽·미국 제치고 이란·일 영화 큰 호응/방화 ‘접속’‘하녀’만 인기지금 부산은 영화열기로 즐거운 몸살을 앓고 있다. 10일부터 시작된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PIFF)는 지난해보다 더 많이 몰려든 영화팬과 영화인들로 흥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영상산업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똑같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개막 4일째인 13일까지 총 유료관객은 12만3,000여명. 폐막을 5일 앞둔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영화제의 유료관객은 지난해 18만명에 비해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주말에는 절반 이상의 영화가 매진됐다. 남은 표를 구하려는 관객의 서성거리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남포동 극장가는 인기있는 영화가 상영되거나 스타들의 야외무대 인사가 있을 때면 발디딜 틈 없는 사람의 바다를 이룬다.
미국과 유럽의 영화를 제치고 이란, 일본영화들이 매일 매진행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현상으로는 장편 극영화 뿐 아니라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아시아 각국의 초기 영화까지 매진 대열에 합류한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작품을 원하는 관객의 수준 향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시아 영화에 대한 뜨거운 호응에 비해 한국영화의 모습은 초라하다. 새 영화 「접속」과 원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 등을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은 그다지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의 영화를 본 영화인들까지도 놀라워하는 확연한 수준차 때문이다.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수상작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 칸 대상 작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차이밍량의 「하류」 등 유명작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영화 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무한한 상상력과 기발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 일본의 젊은 영화 「비밀의 화원」, 이란영화의 탄탄한 기본기를 과시한 모센 마흐말바프의 「가베」, 자파르 파나히의 「거울」 등은 한국 영화계가 최근 들어 국제영화제에서 부진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한국영화가 새로운 스타일과 메시지에 대해 보다 진지해야 한다는 것이 영화제에 참가한 우리 영화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렇지 않는 한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행사는 외국영화를 위한 잔치로 머물 수 밖에 없다.<부산=이윤정 기자>부산=이윤정>
◎대만 감독 차이밍량/‘하류’통해 현대인 고독 영상에/부자성애 장면 등 충격적/대사·음악없이 강한 메시지
대만 차이밍량 감독의 「하류」는 인간의 소외와 단절을 그려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비록 동성애를 소재로 하지만 영화는 현대사회의 빈틈없는 그물에 갇힌 인간의 왜소함과 고독을 실생활처럼 느껴지는 영상에 담아냈다. 대사와 음악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기법 역시 영화의 메시지를 한층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무엇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영화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처럼 물질문명에 포위된 현대인의 삶은 비관적이다. 『삶에 낙관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겉으로는 부유하고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이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언제나 남보다 빨리 달려야 하고 경쟁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안팎이 모두 불안하고 우리는 자손에게 물려줄 정신적인 자원이 고갈됐다』
그런 현대인의 진실을 알리는 방식 또한 파격적이다. 『음악은 나의 영화를 파괴시킨다. 완성된 내러티브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입장이 될 수 없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만을 쓸 뿐이다. 줄거리를 못박지 않고 연기는 배우에게 맡기고, 카메라는 배우가 움직일 때만 움직인다. 영상 속의 것들에 대해 관객이 진짜라고 믿게 하고 싶고,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영화에 참여해 스스로 영화를 완성하도록 만들고 싶다』
동성애자임을 당당히 밝히는 그가 충격적인 부자 성애장면을 넣은 것은 어떤 의도일까. 그는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주위의 압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런 의사 소통이 없던 부자지간이 처음으로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 참혹한 상황에서 얻는 기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홍콩 배우 양조위/‘부에노스 아이레스’ 제한상영 아쉬움/따뜻한 미소로 최고인기/“동성애자 소문 사실무근”
홍콩 배우 양조위(량차오웨이·35)의 인기는 올해 영화제 참가 인사중 최고 였다. 개막식에서도 가장 큰 박수를 받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열린 야외무대 인사때는 밀리는 인파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경삼림」 「동사서독」 「씨클로」 등을 통해 보여준 따뜻한 미소의 이미지로 인기가 높은 이유도 있지만, 일반 상영이 제한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아쉬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개막식때 그 사정을 모르고 『많은 관객이 봐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그는 『등급만 확실히 나누면 문제가 없을텐데…』라며 제한 상영 결정을 아쉬워했다. 자기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새로운 연기 인생을 열게 해줬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왕자웨이 감독은 「아비정전」 이후 7년동안 같이 해오고 있다. 그는 가장 믿음이 가는 감독이다. 그는 배우들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즉흥적인 작업을 즐긴다. 때문에 순간순간 배우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이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아르헨티나에 가서야 남자와의 베드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장국영과 한참을 멍하게 서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이던 그는 영화를 마치고 난 뒤 『취향이 다를 뿐 사랑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동성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동성애자라는 「헛소문」을 의식한 듯 그는 『나에겐 여자친구(가수겸 배우 리우 지아 링)가 있지 않냐』며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이야기 했다.
◎대선주자 “영화제는 표밭”
대선 주자들도 영화제에 잇달아 참석, 영화계의 표밭을 일구는데 나섰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개막식에 참석한데 이어 11일 영화인들과의 조찬을 가졌고,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도 12일 하오 남포동에서 열린 배우 강수연 김민종의 인사 무대에 출연했다. 이인제 전 경기지사 역시 참석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조직위는 영화제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이 요구한 의전을 거부했다. 김 총재는 개막식에서 청중 앞에 나서지 못했고, 이 총재는 배우들이 오른 간이무대 단상에 오르지 못한 채 행사장을 떠났다.
◎젊은 감독들 부산행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 감동, 일정에 없던 젊은 감독들이 자청해서 부산으로 달려오고 있다. 뉴 커런츠 부문에 「비밀의 화원」을 출품한 일본의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표가 많이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행을 결정.
「메이드 인 홍콩」을 출품한 홍콩의 프릿찬 감독도 뒤늦게 14일 밤에 도착해 『꼭 한국 팬들과 얘기하고 싶으니 대화일정을 잡아 달라』며 조직위에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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