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구그림 남긴 예학태두 ‘귀거래소’/그의 ‘가례집람도설’엔 중·일선 볼 수 없는 차기구 그림이 다수/특히 독특한 모양의 찻솔이 17세기 이전에 이미 쓰였음을 증명한다대전에서 국도를 따라 논산쪽으로 가다 보면 연산역으로 통하는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논산쪽으로 2㎞ 가량 더 가면 연산상업고교 안내 표지판 조금 못미쳐 신호등이 있는 삼거리. P턴을 해 왼쪽으로 농로를 따라 2㎞쯤 들어 가면 오른쪽 길옆에 고풍스런 기와집이 덩그렇게 서 있다.
우리나라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이 만년에 귀거래, 후학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마당을 사방으로 둘러 싼 기와집 4채 가운데 정면의 건물이 사계가 머물렀던 염수재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집 전체를 염수재라고 부른다.
사계를 이은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울 이집에는 또 다른 자랑거리가 있다. 대문에 덧붙은 묘한 모습의 홍살문이 그것이다. 사계의 5세손인 김재경의 효성을 기려 조정이 내린 것으로 쉽게 볼 수 없는 효자문이다. 염수재 뒷켠의 사당과 그 뒷동산에 늘어 선 묘 등 뼈대있는 집안의 「큰댁」 모습에서 빠지는 것이 없다.
사계의 13대 종부인 홍용기(74)씨는 사당과 염수재를 지킨 지 꼬박 34년째. 얼핏 봐서는 영락없이 농사일에 찌들린 시골 할머니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나 말솜씨, 몸가짐이 예사롭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문가의 종부다운 기품이 풍겨 나온다.
홍씨는 사계를 「대감님」이라 부른다. 사당에는 법도대로 「대감님」 내외분과 바로 위 4대조까지의 조상 신위가 모셔져 있다. 4대조모가 세분이나 되고 증조모도 두분이어서 모두 13위나 된다. 돌아 가신날 지내는 기제는 물론이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 설날과 추석, 동지와 한식 단오때는 차례를 올린다. 차례라고 하지만 차를 올리지 않고 술을 올리는 것은 여느집과 마찬가지다.
홍씨는 10년전 84세로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가 남긴 말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제례에 꼭 차를 올려 왔으나 6·25 이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차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내가 차 올리는 것(봉차)을 생략했으니 너희들도 무리하게 힘쓰지 말거라』
준비해 간 차를 건넸더니 할머니는 『오랫만에 대감님이 무척 좋아하시겠다』고 반겼다. 차를 우려 내는 사이 사당문을 열어 향을 피우고, 평소에는 열지 않는 신주를 모신 주독까지 열었다. 철철 넘치도록 따른 차 두잔을 「대감님」 내외분께 올렸다. 엄숙하고도 공손한 큰절 4배는 전통예법이 몸에 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원숙한 배례였다.
그의 시어머니는 후사가 없었다. 13대 종손을 이은 양자 선중씨마저 6·25때 행방불명이 됐다. 남편 길중씨가 다시 양자로 들어 와 종손이 됐으나 2년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계의 역작인 「가례집람도설」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차기구 그림들이 많다. 특히 그림에 나오는 차를 젓는 찻솔은 우리에게만 있는 차도구로 밝혀졌다.
사계는 이 그림을 직접 그리고 제기도 아랫 부분에 이런 설명을 달면서 찻솔 등을 특히 강조했다. 『오른 쪽의 제기도는 옛날 아버님을 모시고 연경(현재의 북경)에 갔을 때 얻었던 여러 그림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의자, 상, 탁자, 향로반, 대반, 합, 속모(제사때 그릇에 담은 모래위에 세우는 띠풀 묶음)와 속모반, 술주전자, 잔반, 완, 접시, 숟가락, 젓가락, 술병, 초와 경, 관분(제사때 손을 씻는 물그릇)과 관분대, 화로는 이미 있는 것이다. 축판, 찻솔 및 차탁자는 생각해 그린 것이고 그 나머지 상자나 자리, 술단지, 가마솥과 솥, 세건(손닦는 수건)과 가(제사때 쓰는 옥으로 된 잔)는 모두 삼대기용도에 보이는 것이다』
「가례집람」은 사계가 세상을 떠난 후인 1685년에 간행됐다. 사계는 생전에 각종 제례를 눈여겨 보고 직접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였다. 따라서 이미 17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찻솔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다도 철학」의 저자인 한국다문화연구소 정영선 소장은 『말차를 휘젓는 일본의 말찻솔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19세기 이전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런 모양의 찻솔에 대한 그림이나 설명이 없다』고 밝혔다.
중국에는 13세기 송나라때 심안노인이 그린 길고 좁은 빗처럼 생긴 찻솔이 있을 뿐이다. 일본에도 현재 흔히 쓰이는 말찻솔의 연원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사계의 스승인 송익필(1543∼1599)이 이 찻솔을 「조다 기구」라고 밝힌 글이 있고 사계의 문하인인 유계(1607∼1664)의 「가례원류」(1715년)에도 똑같은 찻솔 그림이 있다. 정소장은 이로 보아 이런 모양의 찻솔은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차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때인 1938년에 간행된 「의례비요」라는 책이 있다. 제례를 알기쉽게 요약한 이 책도 사계의 문헌을 인용, 「유식(제사때 삽시후 문밖으로 나와 기다리는 것) 합문(유식을 할 때 문을 닫거나 병풍으로 가리는 것) 계문(유식이 끝난 후 합문을 끝내는 것)에 이어 점다(마른 찻잎을 우려내는 것)때는 차를 올리고 조금 있어야 할 것이요, 차를 올린 후에 엎드려 있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또 「조문을 가서는 손님이 먼저 곡을 하고 재배한 후 분향한다」고 하고 「분향한 후에 술이나 차를 올리고 머리를 수그린다」고 적고 있다.
성신여대 교육대학원원장 이길표 교수는 『차가 귀할 때와는 달리 요즘은 차를 쉽게 구할 수 있는데도 물이나 숭늉을 대신 올리는 것은 바람직한 예법이 아니다』며 『조상에게 차를 올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알기쉬운 차입문/가루차는 청자에 잎차는 백자에/차와 찻잔사이에도 궁합이 있다
차를 마실 때 어떤 그릇으로 차를 우려 내고 마실까는 사람마다의 기호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의 특성에 걸맞는 그릇을 쓰는 것도 보다 깊은 차세계로 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차를 우려서 마시는 그릇을 다기라고 한다. 다기는 차를 우려 내는 차관과 찻잔으로 이뤄져 있다. 물을 버리는 그릇이나 찻잔 받침, 차를 보관하는 차통, 차를 들어 내는 찻숟가락, 찻상 등 차생활에 필요로 하는 기타 도구는 대개 차구라고 통칭한다.
차를 마실 때 어떤 다기가 좋을 것인가 하는 선택은 막막하고 복잡한 듯하지만 고려의 청자, 조선의 백자라는 도자기 발달사를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차문화와 도자기 문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차문화는 잎차, 가루차, 덩이차 등 다양한 형태로 시작됐지만 대체로 덩이차를 가루차로 만들어 마시다가 잎차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또 같은 잎차라도 전혀 발효되지 않은 녹차로부터 완전발효차인 홍차로 옮기는 추세다.
청자가 발달했던 고려시대에는 가루차가 주종이었고 백자가 꽃피었던 조선시대에는 잎차가 주류였다. 더욱이 이웃 중국에서는 차를 마실 때 마치 우리나라 토화분처럼 생긴 붉은 홍니나 검붉은 자사로 만든 다기를 쓰고, 유럽에서는 홍차를 주로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순백색의 그릇에 담아 마신다. 왜 같은 소재의 그릇을 쓰지 않고 저마다 다른 소재의 다기를 쓸까.
차와 그릇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 그 궁합을 어떻게 맞추면 좋을까. 차를 보고 어떤 다기로 차를 우려 내야 할 지를 생각하는데 이르면 차에 입문해 나름대로 차생활을 즐기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차를 우려내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차맛을 즐길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있는 만남일 수 있다. 차와 다기도 그런 만남을 가져야 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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