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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 황제’ 존 덴버 경비행기 사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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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 황제’ 존 덴버 경비행기 사고 사망

입력
1997.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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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m 상공서 ‘퍽’ 소리후 추락12일 경비행기 사고로 숨진 미국 「컨트리 음악계의 황제」존 덴버(53)의 사망사실은 13일에야 겨우 확인됐다. 추락의 충격 등으로 시신이 심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덴버의 이혼한 첫번째 부인의 동생인 테리 마르텔은 13일 『언니에게서 「추락한 비행기에는 덴버가 타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해 덴버의 사망사실이 최초로 확인됐다. 그러나 13일 아침까지도 몬터레이 카운티 해안경비대와 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측은 『시신이 심하게 훼손돼 신원확인이 어렵다』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과 접촉 중이며 검시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고당시 날씨 등 기상상태가 좋아 이번 사고의 원인은 비행기의 자체 결함 때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NTSB 관계자들은 덴버가 탄 비행기가 유리섬유를 사용, 자체 제작된 2인승 단발엔진의 「실험용」비행기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덴버의 비행기는 12일 하오 5시께 몬터레이 공항을 출발, 20여분이 지난 시각에 샌프란시스코에서 185㎞ 떨어진 몬터레이 북쪽 퍼시픽 그로브의 암초 해안선 부근에 추락했다. 목격자들은 『150m상공을 날던 경비행기가 갑자기 「퍽」하는 요란한 폭발음을 내면서 약간 솟구치더니 수직으로 바다에 추락, 산산조각이 났다』고 전했다. 일부는 『경비행기가 마치 곡예비행을 하는 줄 착각했다』고 사고상황을 전했다.

○…덴버가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추락지점 부근에 있는 자신의 또다른 집에 들르거나 잠깐동안 실험비행을 하려 했을 것으로 현지 경찰은 추측했다.

○…조종사자격증을 갖고 있는 덴버는 최근들어 환경운동단체를 조직, 반핵운동 등에 정열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틈만나면 비행을 즐겨온 「비행광」이기도 했다. 테리 마르델은 『덴버는 비행을 사랑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 최후를 맞았다』고 말했다. 덴버는 89년에도 경비행기를 몰고 애리조나 북부의 한 공항에 착륙하다 비행기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으나 다행히도 무사했다.<몬터레이 외신="종합·박진용" 기자>

◎존 덴버는 누구인가/바다로 간 ‘영혼의 목소리’/사회운동에도 앞장… 89·94년 두차례 방한공연

12일 불의의 항공사고로 사망한 존 덴버(53)는 전세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컨트리 음악계의 슈퍼스타이다.

가수로서의 성공 못지않게 환경, 기아, 동물보호문제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 나서 인간적으로도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왔다. 89년과 94년 두차례 방한 공연을 통해 한국팬들에게도 친숙하다.

43년 12월31일 뉴멕시코주 로스웰에서 태어난 덴버의 본명은 헨리 존 도이첸도르프였으나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개명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 기타를 선물받은 뒤 수련을 시작한 그는 텍사스 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으나 음악에 빠져 결국 학업성적 미달로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해야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나이트클럽 「웜업(주 공연에 앞서 관객들의 분위기를 띄우는)가수」로 활동하며 직업적 음악활동을 시작한 덴버는 65년 뉴욕 이주 후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히트한 「리빙 온 더 제트플레인(제트여객기로 떠나다)」을 작곡, 성공의 가능성을 잡았다. 그는 결국 제트여객기가 아니라 경비행기를 타고 이 세상을 떠났다.

존 덴버는 이어 69년 첫 싱글앨범인 「라임스 앤 리즌스」를 발표했으며, 75년에는 미 컨트리 뮤직협회가 「75년 올해의 노래」로 선정한 「백 홈 어게인」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모았다.

로키산맥의 바람결을 연상시키는 높고 청아한 목소리로 대중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그는 『음악은 우리를 모두 하나로 되게 한다. 사랑과 신념의 표현방법이 다르다해도 음악은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을 통한 「소통」에 남다른 기대를 가졌던 그는 92년 중국 공연에 앞서 85년 냉전 후 미국 예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구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다.

열렬한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환경보호단체 「윈드 스타」를 공동창립했으며, 동물보호 등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공군 조종사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비행을 사랑했던 그는 결국 그가 즐겨 노래했던 자연 속으로 영원히 날아갔다.<배연해 기자>

◎존 덴버의 음악세계/‘모던 포크’ 개척… 대중에 인간애 전파

세계적인 팝 가수 존 덴버의 음악은 각박한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따스한 자연과 순수한 사랑을 담은 구원이었다.

60년대말 LA의 작은 클럽에서 「채드 미첼 트리오」의 멤버로 노래활동을 시작한 존 덴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전기기타를 사용하지 않고 통기타로 불리는 어쿠스틱기타만으로 연주해 당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솔로로 독립한 그의 고집스런 음악이 꽃을 피운 것은 포근한 고향을 연상케 한 노래말이 경쾌한 멜로디에 실린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즈」를 꾸밈없는 자연스런 목소리로 부르면서부터. 그는 이때부터 연속해서 컨트리 계열의 노래인 「로키 마운틴 하이」 「선샤인 온 마이 숄더」 등을 발표해 도시의 삶에 찌든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존 덴버를 논하지 않고 70년대 팝음악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그는 이 시기에 활동한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 듀엣과 함께 모던 포크 음악이라는 새장르를 개척, 만개시켰다. 그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이 시기에 14개의 골든 앨범과 8개의 플래티넘앨범을 기록한 것만봐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의 히트곡만을 모아 제작한 RCA의 「존 덴버히트곡 선집」은 1,000만장이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현재도 전세계 최고 앨범 판매고의 가수 5명중의 한사람이다.

컨트리계열의 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그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음악도 줄기차게 추구했다. 영화 선샤인 주인공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애인에게 불러주는 「마이 스위트 레이디」, 나를 감싸는 오늘이 비록 내게 고통을 준다해도 나에겐 아직도 미소가 남아있다고 노래한 「시와 기도와 약속」,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 「애니스송」, 세계적인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와 부른 「퍼햅스 러브」 등은 존 덴버가 긍극적으로 지향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이 담겨있다.<배국남 기자>

◎특별기고/임진모 팝 칼럼니스트/내가 본 존 덴버/거짓없는 투박함 속에 간직한 순수한 지성은 세계인에게 ‘삶의 고통’이 아닌 ‘삶의 기쁨’을 전했다

89년 내한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존 덴버는 노래로만 오랫동안 추측해온 이미지 그대로였다. 맑고 싱그러운 이미지로 유명한 히트곡들 만큼이나 사람됨됨이도 깨끗해 보였다. 우선 안심이 되었다. 노래는 순수한데 실제 만나보면 때로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팝 스타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투박하다고 할 그 순수함이 70년대 중반 미국인들에게 특장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이해할 만했다. 당시 미국 음악팬들이 열망한 것도 바로 거짓없을 듯한 투박함이었다. 그는 지성보다 감성이 위력을 발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그는 「햇빛촌에 사는 사람」과 같은 순수하고 낙관적인 이미지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먼저 산 햇빛 시골길 미풍 등 자연이 연상되곤 했다. 스스로도 「촌놈」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컨트리 소년이라는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Thank God I’m A Country Boy)」라는 곡을 불러 히트시키기도 했다. 그의 감성이 농축된 곡 「애니의 노래(Annie’s Song)」가 지구촌 곳곳의 결혼식장에서 울려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토록 티없이 맑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혼 재혼 음주운전 등 복잡한 사생활이 더욱 일반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투박한 생김새와는 달리 말투는 지극히 세련되었고 또박또박했다. 기자들의 세세한 질문에 어물쩍 넘어가는 일 없이 명확하고 성실하게 답변했다. 문득 그가 70년대 내내 미국 쇼 비즈니스계의 명사회자였다는 점이 기억났다. 투박함 속에 간직한 지성이야말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빼어난 미남이었거나 마냥 순수하기만 했다면 인기가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베트남전에 시달린 미국인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삶의 고통이 아닌 「삶의 기쁨」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실추된 미국인의 자부심을 되살리는데 기여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소리」라고 일컬었다.

또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힐튼호텔 공연장을 쿵쿵 울려댄 엄청난 크기의 목소리였다. 음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볼륨이었다. 객석은 『정말 노래를 잘한다』는 감탄을 연발했다. 이전까지는 존 덴버와 가창력을 결부짓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입관을 완전히 깨버렸다. 더욱이 그는 20곡이 훨씬 넘는 2시간의 긴 공연중 단 한차례도 물을 마시지 않고 노래했다. 관객들은 너도나도 『괜히 톱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변변치 않은 노래 실력으로 스타가 되기도 하는 우리 가요계 풍조를 나무라기도 했다. 가창력이 무의미해진 요즘의 음악계를 생각하면 한층 그의 무대가 그립다.

그가 남긴 무수한 깨끗한 노래들은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그리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한 그리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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