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살림을 도맡은 사무총장이 포문을 열었다.『국민회의의 대통령후보가 조성한 비자금이 확인된 것만도 670억원은 된다. 돈을 준 기업체의 명단도 확보하고 있다』문제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과정에서 금융실명제의 그물에도 걸려 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기업체로부터 비밀리에 헌금을 거두는 것도 불법이지만 돈의 액수야 많건 적건 은행계좌에 가명 혹은 차명으로 돈을 맡겨 두었다가 엄연히 존재하는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였다면 그것은 더욱 심각한 범법행위가 되는 것이다.
『몽땅 거짓말이다. 허위사실을 날조·유포한 죄로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을 사직당국에 고발하겠다』
국민회의의 관계자들은 펄펄 뛴다. 김대중 총재 자신도 분명하게 말했다. 『나도 전혀 모르는 일이오. 그런 사실 없소』
당사자가 부인한다고 주저앉을 사무총장이겠는가. 『2탄도 있고 3탄도 있소』 그런 뒤에 드디어 2탄이 터졌다. 『계속 부인만 하면 기업체의 명단과 헌금액수와 그 날짜까지 다 밝히겠소』 열도 더 되는 기업체의 명단과 함께 액수도 공개되었다. 큰 일이다.
삼성그룹이 24억원, 대우그룹이 20억원. 가장 많이 바친 기업체는 동아건설, 그 액수는 자그마치 62억5,000만원. 이 폭로가 사실이라면 그렇게 큰 돈을 여당도 아닌 야당에 뜯기고 사업이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도 별로 보이지 않던 야당후보에게 그만한 돈을 주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차고 넘치던 여당후보에게는 몇배나 되는 정치헌금을 하였으리라는 추측이 전혀 맹랑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지 아니한가.
전두환씨나 노태우씨가 대통령 재임시, 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관여한 재벌의 총수들이 유죄판결을 받아(비록 구속되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사면·복권된 것이 불과 며칠전 개천절의 「경사」였는데 이제 또다시 그들의 기업체가 야당에 헌금한 혐의 때문에 검찰에 소환되고 재판에 회부돼야 한다면 줄 것 다 주고 뺨 맞는다는 억울함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경제사정이 이렇게 안 좋은데 왜 또다시 휘청거리는 기업에 매질을 하느냐』는 비난의 소리가 국민회의의 지도부에서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당 내부의 일각에서도 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신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한국당의 대표인 이한동씨는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 때 김대중씨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당직자회의에서 언명한 바 있다는데, 사무총장이 대표 말을 안 듣는다면 이 정당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은 누구를 믿고, 누구 말을 듣고, 이런 엄청난 일을 해치운 것일까. 『일을 우선 저지르고 보자』는 그 결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정치에 입문한 지 얼마되지도 않는 이회창 후보에게 그런 배짱이 있다고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판에 일고 있는 이 폭풍을 지켜보면서 이제 임기가 4개월 밖에 남지 않은 청와대의 주인 김영삼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원하는 상황은 아닐 것이라고 일단 믿을 수 밖에 없다. 신한국당에 비자금 때문에 얻어터진 국민회의가 반격의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의 공개가 야당의 무기로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 항간에 소문이 파다한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쓴 어마어마한 액수의 선거자금 출처를 밝혀야 한다고 물고 늘어지면 여당의 입장도 매우 어려워질 것이 명백하다.
이러다가 야당인 국민회의의 후보만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여당인 신한국당의 후보도 침몰의 비운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나. 제3의 후보가 대안으로 등장하겠지. 그 후보가 누구이겠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정계 일각에서의 음모라고 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이 끝난 뒤 한 여당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나가다간 누가 대통령에 당선돼도 대통령취임식을 하기는 어렵게 되겠다』
나라가 정말 흔들리고 있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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