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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 자존은 있는가(정달영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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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 자존은 있는가(정달영 칼럼)

입력
1997.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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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12일은 조선왕조 말에 고종이 황제위에 올랐던 기념일이다. 1897년의 일이므로 꼭 100주년 된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로 꺼져가던 국운을 추스르려, 독립국의 자존을 힘껏 소리친 것이 대한제국의 탄생이다. 임금이 남의 나라 공관에 옮겨 앉았던 일(아관파천)이 불과 한해 전이므로, 고종의 칭제건원은 자못 눈물겨운 데가 있다. 자주를 뒷받침할 실력이 여전히 모자랐던 이 불행한 제국은 약 13년동안을 이름으로만 견디다가 끝내 일본에 강점됨으로써 멸망했다. 이 망국사는 어지간히 알려진 것이다. 다만 대한제국의 탄생 과정에서 되새기고 싶은 한가지 사실은 「우리도 당당한 독립자주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자는 열망과 압력이 국민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돌아왔을 때 조정에는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존칭하자는 주청이 쏟아졌다고 한다. 나라의 자존을 되살리자는 것이 국민의 소박한 여망이었을 것이다.대한제국이 탄생한지 10년이 지난 1907년,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밀사를 보낸다. 이위종은 대표단의 막내로, 당시 나이 20세의 새파란 청년이다. 그는 불어 영어등 서구 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1907년 7월5일자 「평화회의 신문」은 이위종과의 장문의 회견기를 싣고 있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한제국은 구릉 하나하나가 천연요새를 이루는 산악국가이며, 2,000만 우리민족은 우리나라를 극동의 스위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군사는 전국에 7,000명이 있었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가 초대 주러시아 공사여서 일찍부터 서구 문물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스무살 청년 이위종에게는 나라에 대한 한가지 비전이 엿보인다. 「극동의 스위스」라는 지정학적인 통찰이다.(그의 아버지 이범진으로 말하면,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도 망국의 외교관으로 6년여를 더 버티다가 1911년에 러시아에서 자결·순국한 인물이다)

우리 나라와 국토에 대한 자긍심은 국수주의적인 편협성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1930∼40년대에 중학교 지리교사이자 생물교사였고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김교신(1901∼45)에 의하면 조선 땅은 오히려 도전할만한 곳이며 세상에서 이만한 조건이 다시없는 나라다. 조선역사에 편할 날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 땅이 동양정국의 요충임을 증거하지 않는가. 약자가 한낱 태평함을 구하여 대결을 피하려 한다면 천하에 안전할 곳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다만 중요한 문제는 지리적인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백성의 마음일 뿐이다….

사실 애국심이 문제가 되는 때는 그것이 맹목적일 때다. 맹목적인 애국주의는 해독이 크다. 그러나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면 애국심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 것이다.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해독을 주는 것과 똑같이, 제 나라 제 백성 제 국토에 대한 지나친 자기비하도 해독을 준다. 냉철한 자기판단과 겸손은 미덕이지만 밸도 없고 자긍심도 없다면 그것은 악덕이기 쉽다.

요즘 우리 나라는 바야흐로 자기비하의 시대다. 정치판이 연출하고 있는 폭로전을 보면서 국민은 다만 말을 잃는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다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는 별 수 없는 백성들인가!』

동원되는 용어 자체가 그야말로 「막가파 식」이다. 폭로전을 전달하는 보도들은 「전면전」에서 「융단폭격」, 「사생결단」까지 극한적인 전투·전쟁·범죄용어를 총동원하고 있다. 「폭로」에 나선 정치인의 표정에는 「살기」와 같은 섬뜩함이 있다. 「모든 기성 질서를 깨겠다」는 듯한, 「앞 뒤 가릴 형편이 아니다」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서 자폭의 「핀」을 뽑아들고 있는 절박한 사람의 모습을 본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왜 우리의 정치가 이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는가, 겨우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 지나간 몇십년 민주화를 목타게 추구해왔던가 하는 국민의 실망이다. 욕할 곳도, 욕할 것도 없다. 국민은 스스로를 깎아내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으로 하여금 국민된 자존을 찾게해주는 일이 시급한 오늘이다. 정치는 폭로에서 폭로로 이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비하에 빠진 국민을 걱정하고 구출해내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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