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문명 기원놓고 관련국들 열띤 논쟁/일방주장 강요아닌 공동연구 필요 절감9월29, 30일과 10월2일 서울과 청주에서는 동서 고인쇄술에 대한 유네스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독일위원회, 청주시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 회의는 인쇄문명의 역사적 기원과 영향 등을 검토하자는 것으로 한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의 학자들이 참가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 신문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무구정광다라니경, 직지심체요절의 세계 최고인쇄물 여부와 제작국을 싸고 무리한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는가 하면 중국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중국측의 관심도 대단했다.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4대 발명은 중국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금속활자가 그 발명목록에서 빠지게 되어 명예회복을 꾀하려고 했다. 반지싱 중국과학원 교수는 베이징의 광명일보에 성전을 벌여서라도 명예를 되찾겠다는 요지의 글을 싣기도 했다. 화약과 종이연구로 잘 알려진 그는 다라니경은 702년에 중국 뤄양(낙양)에서 찍어서 신라로 들여왔고 금속활자인쇄도 한국보다 앞선다며 그 증거로 어시책을 들고 나왔다. 그는 한국이 인쇄술에 있어서 중국에 앞설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잡혀있는 것 같았다.
중국의 현재 영토가 모두 한족의 것은 아니었다. 위구르, 서하족들은 독자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찰흙활자나 나무활자도 만들었다. 종이 전문가라면 다라니경의 종이에 대한 검증을 거친뒤에 결론을 내려야 할 터인데 실물도 보지않고 측천무후자가 들어있다고 702년을 인쇄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학자들도 불국사가 완공된 해가 751년이라 하여 다라니경의 연대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불국사가 완공된 해를 다라니경의 연대로 잡으면 석가탑이 기단부터 세워서 사리를 모신 뒤 위층까지 한꺼번에 이룩되었다고 보는 것으로 된다. 글자체 연구 등은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금동사리함 밑돌이 안에서 나온 연기는 읽어내지도 못하고 최초-최고 목판인쇄라고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다라니경은 보수되었지만 같은 국보로 지정된 묵서지편(연기)은 읽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직지심체요절이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물이라고 하는 표현도 잘못이다. 고려활자임을 입증하는 실물활자가 있고 남명천송증도가와 상정예문이 직지보다 앞서는 금속활자 인쇄임은 오래전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한편 어시책을 중국 것으로 본 것은 반교수의 실수이다. 반교수는 이를 중국이 한국보다 먼저 금속활자 인쇄를 하였다는 증거라고 했지만 이 책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찍어낸 것이다. 이 책은 1315∼1333년 원나라 과거시험의 친시답안을 모아 찍어낸 것이다. 원나라 수험생의 답안이지만 이러한 답안을 한국에서 찍은 예는 제법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찍은 연대가 나와 있지 않다.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심체요절에는 1377년에 찍었다는 간기가 있다. 중국이 30년쯤 앞선다고 하는 이야기는 책의 내용만을 보고 내린 반교수의 잘못된 결론이다. 윤병태 교수의 재빠른 조사로 고려대에 있는 같은 책이 발견됐고 한국의 금속활자본임이 밝혀진 바 있다.
나는 회의를 마친 뒤 반교수에게 어시책에 대한 주장이 틀린 논증이었다고 말했고 앞으로 고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 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중국학자들은 이 학술회의에 앞서 우리말로 그들의 주장을 담아서 찍어낸 책자를 기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측 학자들은 지나치게 흥분하고 논문의 발표보다는 반선생을 반격하는 것이 목적인 양 보였고 독일 프랑스 일본학자들은 이를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나에게 불평하기도 하였다.
우리 겨레는 지식을 나누어 가지기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겨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경서나 경전을 보존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배워야 할 책을 찍어서 나누어 주고 공부하게 하는데 더 마음을 써온 것으로 보인다. 인쇄문화가 발달하는데 사회심리가 크게 작용한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학회의 발표에 있어 유럽이나 일본 등 다른나라의 연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고 가능하다면 인쇄와 통신에 대한 공동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기록문화유산의 보존, 과학방법에 의한 연구, 서로간의 영향 등을 밝혀야 한다. 어떠한 연구이든 사회의 배경과 다른사회의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떠한 발명도 단독으로 이루어 지는 일은 드물며 서로간의 생각,필요,영향이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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