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글날이다. 해마다 이 날을 맞이하면 가을날씨 답지않게 내마음의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덮인다. 오래전부터 모두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채 넘기고 있지 않나, 신문이고 방송이고 어디를 살펴봐도 한글이 살아 숨쉬는 데가 없지않나. 그렇다고 이런 일로 해서 마음이 어두어지는게 아니다. 이 땅 어디에도 겨레말이 발 붙일 데가 없는 사람살이의 뿌리없음에서 짙은 어둠이 밀려오는 거다.모든 나무는 흙이 있어야 자란다. 사람은 말이라는 흙에 뿌리내리고 사는 한 그루 나무다. 말이 곧 겨레이며 겨레란 말떼가 어울린 떼살이들일 터인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겨레말 죽이기를 버릇하며 살아온다. 얼이 스미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부지런을 떨고 있다. 잘 살아보자고.
그러니 오늘이 숨막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배운 사람일수록 내 나라말에 어두운 일이다. 쉬운 낱말 몇개만 물어보아도 말대꾸 제대로 하는 이를 만나기 어려우니 이 숨쉴 수 없는 머리들 앞에 입이 벌어지기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들이 대학 국문학과에서 나라말을 두루 배운 이들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너무도 놀랍고 기가 차서 한숨만 나오게 된다. 왜 이럴까.
나라말이 없어 중국글자에 시달리는 것이 보기 딱해, 아무나 쉽게 배워서 제 뜻을 글로 나타내기 바라는 마음에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세종대왕의 「말씀」이 있었듯이 한글의 좋은 바는 배우기 쉬운데 있다. 그러나 글을 지어 먹고사는 이들도 남이 「교정」을 보아주어야 하고 아무나 보라고 한길 가에 세워두는 글자판도 맞춤법이 틀리기 일쑤이니 한글이 어느나라 글인가.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
지난해인가 우리가 쓰고 있는 들온말(외래어)을 우리말로 바로 잡았다는 책을 보내왔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펼쳐보고 눈이 깜깜해진 일을 겪은 바 있다. 나랏돈을 들여 애써 우리말로 바로 잡았다는 그 「우리말」에 한글은 눈에 뜨이지 않고 모조리 한자로만 되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나라말연구를 도맡고 있다는 곳에서 하는 일이니 한글이 어느 하늘 아래서 나라글로 받아들여지기 바랄까.
나는 이런 모든 잘못이 「표준말 사정」에 있다고 보아온다. 우리 「표준어 규정」의 바탕이 되어오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서울의 중산층이 쓰는 말을 표준」으로 한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70년 가까이 이를 지켜오니 정작 우리 토박이말은 발 붙일 땅조차 없이 된 것이 우리말의 알짜 모습이다. 「서울의 중산층(새 규정에는 현대 서울말로 바꾸었지만)」이 누구인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지은 뒤부터 이를 업수이 여기고 물리쳐 끝내는 나라글 구실을 못하게 만든 무리가 아닌가. 「문자」가 아니면 말도 하지않던 그들이 지녀온 「나라말」이 얼마나 되기에 표준으로 삼아야했나.
말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땅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나무와 같다. 바람이 많고 물이 거친 바닷가는 바람과 물너울의 이름이 가지가지일 것이며 숲이 깊은 고장에는 숲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 또한 많을 것이다. 거친 바람도 드물고 하늘을 가린 숲도 없는 서울사람들에게는 모두 낯선 모습들이니 말 또한 생겨날 터무니가 없다.
국어사전을 보면 「부대기」를 방언이라고 내치고 화전을 표준말로 삼고 있다. 이는 다만 화전 하나로 그치는게 아니다. 서울사람이 모르는 고장말을 모조리 사투리로 내치고 나면 살아가는 길이 가지가지인 그런 고장에서는 목두기(무엇인지 모르는 귀신의 이름)가 되어 너울너울 춤출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말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영어나 일어를 한문으로 바꿔놓고 우리말로 바로 잡았다고 내대는 사람들에게 일 잘했다고 나랏돈을 풀어주니 정작 나라말은 어디 가서 하루 먹을 곡식이라도 얻으랴.
이쯤 왔으니 겨레 나름의 얼을 되찾아야겠다.
쉬운 나라말을 쉽게 배우고 거기서 남아도는 힘으로 일하는 길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일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허구한 날을 글방에 앉아 젊음을 죽치기에는 우리앞에 쌓인 일더미가 너무도 크다. 일더미를 헤쳐나가야 한 걸음이라도 나라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 또 갑갑한 오늘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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