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301조라는 칼을 거두게 하려면 그들의 통상정책의 급소를 공략해야한다얼마 전까지 우리 주변에서 「공주병」 「왕자병」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주제를 모르고 자기 미화에 빠진 사람을 빗대는 말이다. 미국은 유독 「슈퍼」를 좋아한다. 차 집 사람 땅이 크고 심지어 시장도 커서 「슈퍼마켓」을 탄생시켰다. 20세기를 주도해온 강대국으로서는 자연스런 습관이겠으나, 통상법에까지 슈퍼조항을 달아놓을 정도이니 아무래도 미국의 「슈퍼병」은 너무 지나치다. 아무튼 「슈퍼 301조」의 발동으로 우선협상대상국인 우리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첨단장비로 무장한 「슈퍼맨」과 「슈퍼 람보」가 한반도를 향해 달려오는 듯한 불안감도 있겠지만, 조급해 할 일은 결코 아니다. 거인일수록 급소가 노출되어 있는 법. 정공법은 불리하고 현명한 대안도 궁색한 현 상황에서 급소를 공략하는 한국 전통무예의 가르침을 되새겨봄직하다. 미국의 급소는 국내정치에 숨어 있다.
공정거래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는 정책금융이나 전략산업과 같은 정부주도의 성장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시장 개척으로 기업이윤을 증대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최대의 무기이다. 그러므로 교역상대국에 관세인하와 제도적 장애물의 철회를 요구하는 슈퍼 301조는 가장 중요한 성장정책이 된다. 그런데 성장정책만으로는 정권유지가 어렵다. 서민을 위한 적절한 복지정책이 따라야 한다. 저렴한 양질의 생필품 공급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미국에 한국은 훌륭한 생필품 공급기지였다. 한국이 이 역할을 그만 둔다고 해서 미국이 아쉬워할 것은 그다지 없겠으나 공급선을 바꾸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교역망은 이미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또한, 중국에 이 기회를 주어 일찌감치 경제대국을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보다 더 예민한 아킬레스건은 미국의 통상정책이 이익집단의 입김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번 「슈퍼301조」 발동의 일등공신은 앤드루 카드 자동차공업협회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번 일을 성사시켜 득의만만해 하고 있지만, 외국차 점유율이 지극히 낮을 수 밖에 없는 한국에서 미국 지분을 차지하고 말겠다는 미행정부의 결의는 자중지란을 일으킬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이제 한국은 미국과의 교역량으로 7위, 수출량으로 5위를 차지하는 통상파트너로서, 곡물 축산물 담배 군수장비 등의 대량소비국이 되었다. 게다가 정보통신의 수요가 폭증하는 한국은 미국의 황금시장이다. 이런 마당에 한국이 과감하게 수입선의 다변화를 주장한다면, 미국의 곡물메이저들이 가만있을리 없고, 최강의 로비력을 자랑하는 담배협회가 슈퍼301조의 철회를 요구하고 나설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대장균으로 오염된 쇠고기로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이 때 신물산장려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미국상품의 수요가 급속히 냉각된다면 미 행정부의 입장은 난처해질 것이다. 소비재의 교역비중이 작더라도 그것의 상징효과는 대단히 크다. 사실상, 최근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80년대의 경제위기를 다시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가 서려있다. 80년대초 자동차업계가 일본에 강타당한 이후, 섬유 신발 전자 철강업계도 한국상품에 초토화됐던 쓰라린 경험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0년만에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을 이토록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국은 자국상품이 자본주의시장의 공통언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 듯하다. 미국은 과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미국산 자동차가 길이 좁고 기름값이 비싼 일본에서 팔리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약 10년을 소요하였다. 더욱이 외국에서 대부분의 생필품을 조달해온 미국으로서는 한국사람들이 왜 굳이 비싼 국산품을 선택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동차의 경우처럼 미국기업이 한국수요자에게 접근하는 과정에 몇 단계의 제도적 장애물을 설치해 놓은 것은 사실인데 특수사치품은 국민정서와 통합에 위해롭다고 보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WTO체제 이후 슈퍼 301조는 사문화되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이다. 94년이후 미국은 슈퍼 301조를 15번 발효시켰지만 무역보복은 한번도 없었으며, 3년전 일본에 대한 강경조치도 슬그머니 발을 빼는 선에서 마무리한 바 있다. 자기중심주의와 슈퍼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인이 빼어든 칼을 거두게 하려면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거인의 이런 속사정을 우선 알아차리는 것이 실익위주의 대안모색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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