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적 계몽의 절정어째서 사랑인가. 온통 사랑타령에 빠져 있는듯한 요즘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히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다. 혹자는 소설이 통속성에 굴복한 까닭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아마도 사랑이 현대인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불변의 윤리가 존재하지 않고, 각자가 타인에게서 받는 인정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도록 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개인의 자기발견에 중요한 경험이 된다. 그런만큼 사랑의 환희와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소설은 개인의 실존적 딜레마에 다가간다.
은희경의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세계의 문학」 가을호)은 남녀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는 작품이다. 작중 화자는 미혼의 직장여성으로 삼년 전, 십년 연상의 유부남에게서 청혼을 받으면서 시작된 번민을 이야기한다. 어린 여자와 새로 가정을 꾸미려는 유부남의 욕망, 다른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는 자신의 처지를 헤아린 끝에 그녀는 그와의 관계에 미련을 버리기로 작정한다. 이러한 결심에서는 마침 같은 시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첩을 보아 어머니에게 이혼을 요구함으로써 촉발된 부부관계의 이면에 대한 성찰이 긴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결혼이 사랑을 선하게 하지도, 지속되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은희경의 다른 좋은 작품에서 그렇듯이 「명백히…」에서도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남녀의 심리를 취급하는 방식은 비범하다. 그것은 연인이나 부부의 삶이 포함하는 범속한 거래의 속성, 남녀의 결합이란 관념에 흔히 감춰지곤 하는 각자의 자기충족을 위한 타산, 사랑을 절실하게 하지만 또한 허망하게 하기도 하는 모순된 욕망을 분별하여 기록한다. 여기에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존재의 진실은 고독일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명백히…」에 따르면, 사랑이란 고독한 개인의 자기모순의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자유롭고자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에 집착하는 모순 속에 사랑의 미혹은 존재한다. 사랑이란 결국 일시적으로는 고독에 대한 위안이며 항구적으로는 자유의 상실이라고 시사하는 은희경의 태도는 때론 소름이 끼칠만큼 냉철하다. 그의 사랑의 해부학은 우리 소설이 근래에 도달한 개인주의적 계몽의 절정이라 해도 좋다.<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동국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