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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안훙/베트남 출신 프랑스 감독(시네마 뉴웨이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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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안훙/베트남 출신 프랑스 감독(시네마 뉴웨이브:5)

입력
1997.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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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감성의 색채 마술사/극도로 절제된 대사 강렬한 질감의 미학/‘그린 파파야 향기’‘씨클로’ 단 두편으로 정상반열에1m60㎝가 될까 말까 한 작은 키, 가냘픈 어깨, 동화의 나라에 사는 듯 맑고 선한 얼굴. 자칫하면 부모를 따라 극장에 나선 어린아이로 오해할 수도 있다. 베트남 출신의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훙(35).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 속에 이글거리는 예술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영상의 거인이다.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 등 그가 만든 영화는 단 두 편이다. 그러나 그 두 편으로 트란 안 훙은 다음 세기의 영화를 이끌어 갈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93년의 데뷔작인 「그린…」은 칸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격인 황금카메라상과 세자르상 신인감독상을, 95년의 두번째 작품 「씨클로」는 그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그에게 선사했다.

무엇이 그를 벼락출세시켰을까? 트란 안 훙의 마력은 신비스런 동양적 감성과 강렬한 색깔로 요약된다.

그의 영화는 대사가 극도로 절제돼 있다.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대사와 그 사이의 긴 침묵은 그러나 헤픈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동양화에서 여백이 내뿜는 함축된 아름다움과 맥을 같이 하는 듯하다.

영상은 때로는 파스텔톤으로, 때로는 물감을 스크린에 벅벅 문질러 놓은 듯 강렬한 질감으로 채워져 있다. 빛과 색채의 절묘한 혼합은 고즈넉하고 따스한가 하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원색적이고 광적이다.

이러한 영상 감각은 두말할 나위없이 유년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재단사 부부의 2남중 장남인 그가 부모를 따라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것은 12세때. 열대의 진한 색채와 나른하면서도 끈적끈적한 대기가 그의 기억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또한 색깔에 독특한 안목을 지녔던 어머니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어머니는 요리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맛 뿐 아니라 음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죽 한 그릇에도 초록색 풀과 붉은 빛의 새우가 예쁘게 얹어졌다』고 자신의 색채감각을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영화에 입문해서 감독수업보다는 촬영수업에 더 열심이었던 점도 그의 영상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트란 안 훙은 촬영부문에 집중적으로 인재를 길러내는 루이 뤼미에르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받았다. 감독을 길러내는 프랑스국립영화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감독은 학교가 아니라 현장에서 교육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트란 안 훙은 50년대 베트남의 모습을 담은 「그린…」과 90년대 베트남의 혼란을 묘사한 「씨클로」를 자신의 영상언어로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시선은 계속 조국에 머물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린…」과 「씨클로」는 베트남의 일부를 그린 것에 불과하다. 조국의 현실을 여러가지 영상으로 모자이크해 베트남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씨클로/처연한 컬러로 뿜어낸 절망/90년대 베트남 혼란상 극렬한 색 대비로 표현

『아들아, 인력거(씨클로)는 우리의 밥줄이었다…』

아버지의 슬픈 독백으로 시작되는 「씨클로」는 90년대 베트남의 혼란상을 함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감독은 사회주의가 남긴 빈곤과 자본주의가 몰고 온 혼란의 틈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베트남의 도시를 낱낱이 해부한다.

생업의 수단인 씨클로를 잃어버리자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급속히 타락해가는 소년, 사랑을 위해 매춘을 하는 소년의 누나, 연인에게 매춘을 알선하는 갱조직의 보스. 세사람이 극한으로 치닫고 절망하는 모습을 통해 가치관이 무너져가고 있는 오늘날의 베트남 사회를 내비친다.

감독은 그 혼란을 극렬한 색깔의 대비로 표현하고 있다. 진록색 수초가 흔들리는 어항에서 새하얀 셔츠에 선연하게 번지는 붉은 피로, 즐겁게 웃는 천진난만한 소녀들의 발그스레한 뺨에서 푸른 페인트로 온몸이 범벅이 된 소년의 몸부림으로 영상의 분위기를 마구 흔들어댄다. 드럼소리가 기관총을 쏘는 듯 폭발적인 래디오헤드의 「Creep」에 맞춰 노란 조명 속에서 춤을 추는 누나의 살색은 차라리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평자들은 「베네통 컬러로 채색한 베트남의 절망」 「가장 노골적인 현실에서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환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배우들의 열연도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홍콩차이나의 양조위가 누나의 연인이자 갱조직의 보스로, 트란 누 앤케가 누나로 출연했다. 주인공 소년역의 신인배우 르 반 록은 베트남에서 1,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선발됐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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