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경제정책 전반에 일관성을 못갖추면 통상외교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자동차협상의 결렬에 따라 미국이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 관행(PFCP)」으로 지정한데 대해 몇가지 기본적인 반론을 제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차시장 개방 「협상」이라는 용어자체가 적절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협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련당사국들의 합의아래 이루어지는 상호이익을 위한 접촉과 타협의 모색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 분규의 경우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강요하는 「협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가로 한국이 주장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음으로 슈퍼 301조라는 국내 무역법에 근거한 일방적·쌍무적 조치야말로 미국이 주도해서 설립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가장 금기시하는 규정위반의 대표적인 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보호·보복조치를 유발할 수 있음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만 실질적인 특혜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UR과정에서 한국이 미국에 특별히 후속협상을 약속한 것 같지도 않다. 정부도 주장하듯이 미국이 요구하는 관세율, 내국세율 및 세제조정은 입법사항이며 우리의 고유한 경제주권에 속하는 영역이다. 또한 미국 역시 복잡한 조세체계를 갖고 있으며 특히 고가품에는 높은 사치세율을 적용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미국은 대한국무역에서 연 100억달러 이상의 흑자를 나타내고 있다.
정부가 내세운 주장에 하등의 하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한국이 자동차 수출대국 또는 제2의 일본으로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전해진다. 미국내 갖가지 정치적 이유가 작용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여하간 막강한 대외협상권을 등에 업은 미국식 힘의 논리에 또한번 당한 셈이다. 한 나라의 대외협상권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킬 때 국내시장의 크기, 소득규모, 부존자원 상황 및 산업의 경쟁력에 따라 그 강약이 결정된다. 이런 기준들을 적용한다면 양국 사이 협상권의 격차를 다시 논할 필요 조차 없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 이외에도 대외적 시장 다변화의 노력은 협상권을 제고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중규모 개방경제를 추구하는 나라에 있어서 시장다변화는 지속적 성장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이번 분규는 특정시장에 대한 과도한 일방적 의존이 가져올 수 있는 피해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또 한국의 입장에서 효율적인 통상외교의 전개가 협상권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통상외교의 성과가 단순히 대외협상제도나 기교에 달려있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내경제기반과 일관성있는 정책기조에 기초할 때 비로소 대외적으로 그 설득력과 실효성을 기대할 수 있다. UR과정에서의 다변협상은 물론 2국간 협상에서 한국이 최소한의 양보에 머무르려는 수세로 몰린 근본적 이유중의 하나도 국내경제정책 전반에 걸쳐 체계, 일관성, 정합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세확립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특히 80년대말 일시적인 경상수지흑자 실현과 더불어 나타난 섣부른 자유주의는 시장개방을 더욱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UR를 비롯하여 대부분 협상에서 대폭적인 양보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8%대를 중심으로 한 균등관세율의 도입, 국내 부가가치생산에 대한 역보호적 관세율구조, 농산물부문내 왜곡된 수입시장보호체계, 양허관세율보다 낮은 실행관세율 그리고 섬유·신발류에 대한 극히 낮은 관세율 등의 성급한 정책은 오늘날 그 부작용을 수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미국이 한국경제를 확고한 정책기조가 없다고 보고 항상 힘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간 거의 모든 경우 한국이 양보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시 말해 허술한 내실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적 명분을 좇는 나라로 인식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상되는 미국의 보복조치를 WTO에 제소함으로써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정부의 결정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제 미국과 본격적인 「협의」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음 정권으로 이어지기는 하겠지만 정부는 이 기회에 통상외교의 강화, 말만 아니라 이를 밑받침할 수 있는 경제·산업정책의 기틀을 확립하는 과제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심해주기 바란다. 이번 자동차분규는 냉혹한 국제경제 현실과 함께 어떻게 대책을 수립해 나갈지 그 접근방법을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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