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긴급심문 유려한 문장구사에 감탄/“왜구라면 어떻게…” 중국관원들도 예우/“본국송환” 통보받고 사시지어 답례까지최부 일행이 도적떼에게 털린 센옌리(선암리)부터 선인의 고행의 길을 찾아나섰다. 서남쪽으로 5㎞지점의 푸펑리(포봉리), 흙먼지를 뒤집어 쓴 허름한 민가 10여채가 흩어져 있다. 최부는 여기서 왜구로 오인하고 출동한 명나라 관군과 부딪쳤다. 지휘관은 하이먼웨이(해문위)군관구 예하 타오주수어(도저소)의 일선기지인 탕터우자이(당두채)의 대장 부천호 쉬칭(허청). 최부가 드디어 명의 법과 질서의 집행자와 조우한 것이다.
긴박한 상황이 그것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부가 상륙한 곳의 관할인 스즈자이(사자채)대장은 왜선 14척이 침공해왔다고 상부에 과장 보고했다. 전공을 세울 욕심에 전원을 죽이려고 현장으로 말을 몰았다. 일행은 최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이미 내륙 깊숙히 이동,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종종 일어나는 비극이지만 일선지휘관의 독단과 오판으로 처참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질 뻔했다.
푸펑리 노상에서 긴급심문이 벌어졌다. 최부는 조선관원 신분과 표류상황을 설명해 보호와 선처를 호소했다. 물론 필담이었다. 43명의 목숨이 달린 긴박한 시간이 흘렀다. 쉬칭은 일단 최부의 주장을 수용했다. 사색으로 물든 일행의 얼굴에는 얼핏 안도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초췌했지만 최부의 인품과 명문이 즉결처분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최부는 쉬칭의 요청으로 시까지 지었다. 쉬칭의 교묘한 테스트였다. 쉬칭의 직속상관은 천화(진화), 그 위에 하이먼웨이의 사령관인 「파총송문등처비왜지휘동지」 류저(유택)가 있다. 최부는 타오주수어에서 류저의 심문을 받는다. 왜구냐 조선관원이냐, 그 판가름으로 생사가 좌우되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해상방위 체제에서 류저의 심문은 제1심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심리였다.
류저의 심문은 윤 1월21일, 22일 이틀동안 철저하게 진행됐다. 현지 군사령관의 사실심리는 상급기관과 중앙정부에 책임지는 기본심리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심문은 군기관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였으나 내용은 포괄적이면서 치밀했다. 먼저 국경침범죄로 군법으로 처형할 수도 있지만 정상을 참작, 사실심리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 인정심문으로 최부와 일행의 이름, 가족관계, 경력, 현직 등 인적사항과 표류경위 등에 대해 심도있게 조사했다.
왜구가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집요하게 추궁당했으나 최부는 끝내 조선관원 신분과 표류에 의한 국경침범의 비고의성을 낱낱이 해명했다. 최부의 인품과 중국인도 놀랄만한 탁월한 한문문장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부가 지닌 물건이 증거로 인정됐다. 관인, 마패, 한복, 각종 공문서, 방목(과거시험합격증), 서적 등. 무기로는 활 1개, 환도 1자루(관원의 표지물)뿐. 사실상 비무장이나 다름없어 사태수습에 크게 도움이 됐다.
류저는 조선의 국가제도, 문물, 지리, 산물, 그밖의 군사정보 등을 캐물었다. 최부는 군사정보만은 답변을 회피했다. 철저한 공인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부일행은 마침내 왜구의 혐의가 풀렸다. 사지에서 벗어나 조선의 표류민으로(게다가 조선국왕 특파관원의 자격) 명의 법규와 관례에 따라 본국송환이 결정된 것이다. 『「당신들이 혐의를 벗었으니 나는 예의로 대접하겠소. 모두들 안심하고 걱정하지 마오. 북경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빨리 짐을 챙겨 서두르시오」라고 한 다음 다과를 대접한다. 고마워서 사시 한 수를 짓고 절했더니 절할 필요없다고 한다. 다시 절하자 그는 일어서 맞절을 했다』 류저의 사람됨이 잘 묘사된 최부의 기록이다.
푸펑리에서 타오주수어로 가는 길은 준령을 구비구비 도는 험로이다. 타오주수어에 도착한 때는 해질 무렵, 멀리 텐타이(천태)산맥의 주홍빛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타오주수어는 500여년전 최부 일행의 체취를 간직한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성내부에는 수백호의 인가가 밀집해 있고 때마침 저녁이라 거미줄처럼 엉킨 수로에서 찬거리를 다듬고 집집마다 저녁준비가 한창이다. 성이 유적이 아니라 삶의 터로 숨쉬고 있다.
성북쪽에 자리잡은 명나라 항왜명장 치지광(척계광)기념관을 찾았다. 1561년 타이주 일대를 휩쓴 왜구와의 전쟁에서 그는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촐한 사당 정문의 대련이 눈길을 끈다. 「회고하수유적벽 어모수불억도저(역사를 찾아 왜 적벽에만 가는가, 원수를 물리친 도저를 그 뉘가 잊으리」. 가슴뭉클한 명문이다.
◎명나라의 지방 군제/도지휘사사 밑에 작전단위 위·소/왜구대비 연해 전담 방어기구도
명의 지방군제는 전국 각 성에 군관구격인 「도지휘사사(약칭 도사·정2품)」가 있고 관하에 「위(지휘사·정3품)」, 「소(천호소 정5품, 백호소 정6품)」가 있다. 위·소는 실질적인 작전단위로 「위소제도」라 일컫는다. 편제는 1위가 5개 천호소로 편성, 병력은 약 5,600명. 천호소가 10개 백호소, 병력은 1,120명, 백호소가 병력 112명이다. 저장(절강)성은 항저우(항주)에 「저장도사」, 그 밖의 여러 곳에 위·소가 있다.
타이저우(태주)부의 경우 타이저우만 입구의 하이먼웨이(해문위), 남쪽의 숭먼웨이(송문위)가 남부 저장성을 방어하는 투 톱 시스템 구실을 했다. 하이문웨이 관하의 타오주(도저)천호소, 젠티아오(건도)천호소는 해상방위의 요지로 명 건국 초기인 1387년(태조 20)에 설치됐다. 최부가 닿은 곳은 타오주천호소 관내이므로 일선 병력이 긴급 출동했다. 쉬칭은 천호라지만 정천호 천화보다 한 계급 아래인 부천호(종5품)로 생각된다. 한편 이와 같은 상비군체제를 기본으로 빈번한 왜구침략에 대비해 연해지역에 전담 방어기구인 「총독비왜도지휘사」를 1397년부터 설치, 운용했다.
이 때 저장성의 총독비왜도지휘사는 황중(황종), 류저(유택)의 직속상관이다. 최부사건은 타이저우지역의 대왜방어사령관인 파총송문위비왜지휘동지(약칭 파총관) 류저가 담당, 단독심리하고 속관인 쉐민(설민)만이 참여했다. 천화가 완전히 소외된 것을 보면 파총관 류저의 권한을 가히 알 수 있다. 류저의 직함이 「송문위파총관」으로 되어 있어 마치 숭먼웨이만의 지휘관처럼 보이나 사실은 숭먼웨이와 하이먼웨이, 두 위의 지휘관인 이른바 「송해파총관」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1557년 처음으로 설치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훨씬 앞서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표해록 초/“시가에는 뜻을 두지 않았지만 남이 선창하면 응답은 하오”
윤 1월19일: 『시가는 풍월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도를 배우는 독실한 군자가 할 바는 아니오. 나는 격치 성정을 학문으로 삼고 있소. 시가에는 뜻을 두지 않았지만 남이 선창하면 응답은 하오』(관사에서 중국 선비 노부용·노부용이 시를 지을 줄 아느냐고 묻자)
1월20일: 『상립이라 하여, 상을 입은 사람이 쓰는 갓이오. 우리나라 풍속에 의하면 친상을 당한 사람은 누구나 분묘 옆에 막사를 짓고 3년간 묘를 지키는데, 불행하게도 나처럼 표류를 당하거나 부득이 먼 곳을 가는 사람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으므로, 피눈물나는 슬픈 마음을 이 깊은 상립 속에 간직하고자 쓰는 것이오』(중국관리 천화·진화가 쓰고 있는 갓이 무슨 모자냐고 물었을 때)
1월21일: 『조선의 강토는 무려 수천여 리에 달하며 8개의 도가 있소. 이에 소속된 주·부·군·현이 3백여 개이며, 소산물로는 인재·오곡·말·소·닭·개 등이 있소. 경전으로는 사서오경을 존중하고 있으며…』(왜구 방비 책임자인 파총관 류저·유택가 조선에 대해 낱낱이 공술하라 했을 때)
1월22일: 『공술서는 사실 그대로 써야 하는 것 아니오? 설사 번잡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잘못은 아니지 않소? 도적을 만난 대목을 삭제할 게 아니라 오히려 「모두 군복을 입고」란 말을 더 써 넣어야겠소. 도적을 만난 대목을 굳이 빼려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오?』(파총관이 중국 땅에서 도적을 만난 것과 주민들에게 매질을 당했다고 최부가 쓴 공술서의 내용을 고쳐달라 요구하자)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는 말이 있소. 어버이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임금에게 충성을 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소. 하물며 부모를 오랫동안 봉양하지 못함에, 해가 서산으로 지려고 할 때 어찌 돌아가신 아버님과 집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파총관이 나랏일로 표착하였으니 충을 위해 효를 희생한 것이라며 왜 고향 생각만 하느냐고 최부에게 다그치자)<최기홍 역 「표해록」에서> <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타오주수어·도저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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