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한민족 평화제전」이라고 이름한 국제행사가 열린 일이 있다. 올해로 90주년을 맞이한 이준 열사의 순국을 추모하고, 그 순국의 무대이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아울러 기념하는 자리였는데, 그 곳에서 특별히 초청된 김수환 추기경이 「평화의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그 내용이 매우 괄목할만한 것인데도 세상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김 추기경의 「평화의 메시지」는 제목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헤이그 선언」이다. 7,000만 내외동포를 향한 호소문 형식의 이 「선언」에는 4개항의 중요한 「제안」이 담겨 있다. 민족화해를 위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실천계획이 그 내용들인데, 마지막 제4항만은 다소 추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기도를 하자』고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문은 이렇다.
「평화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습니다.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오늘부터 『하느님, 이제 우리나라에도 평화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합시다」
그러고나서, 김 추기경은 메시지의 마무리를 한 유명한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알려진 것이다. 특정한 종교의 차원에 머물지않는 보편성이 있어,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사랑받아온 기도의 시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의 주인인 프란체스코 성인의 고행이나 청빈, 그 정신의 천의무봉이 전설을 넘은 현실의 역사이고, 서구 사상사의 결정적인 맥락임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몸에 그대로 입은지 2년만에 죽어, 다시 6년만에 시성된, 평화의 사도라는 이름 그 자체인 성인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중부 이탈리아를 덮친 강진으로 그의 유적 도시 아시시의 기념성당이 일부 무너져 다수의 사상자가 나고, 세계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700년 전의 프레스코 벽화가 손상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10월4일)는 전세계의 교회가 프란체스코 성인을 기념하는 지정된 날이다.
김 추기경의 평화 메시지는 4개항의 제안에 앞서, 「문앞에 와있는」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한 3개항의 현실인식을 『90년 전 순국한 열사의 심정으로』 토로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 내용은 첫째 「전쟁의 시대는 가고 경쟁의 시대가 왔다」는 사실, 둘째 「이념의 시대는 가고 민족의 시대가 왔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가 「분열의 시대는 가고 통합의 시대가 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통합의 시대는 이렇게 강조된다.
『세계의 분단국들이 모두 다 통합했다. 우리 민족도 이제는 통합해야 한다. 어떤 이념도 어떤 정권도 민족의 통합을 더이상 막아서는 안된다. 오로지 정권을 잡기 위하여 민족을 분열하는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 헛된 이념을 가르치던 거짓 선생들은 이미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백성들을 억압하던 독재자들도 대부분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오랜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역사의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며칠, 우리의 대선 후보들은 동시다발로 영남지역에 몰려가서 행사를 하고 토론을 하고 지역공약을 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 지역 출신 출마자가 없는 무주공산이기 때문인데, 듣고 보다보면 이 지역이 마치 「딴세상」이나 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지역성을 극복하고, 그 통합을 이루고, 나아가 민족의 화해와 남북의 통합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정치지도자들은 큰 눈으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평화의 기도」가 요청되는 까닭이 이것이다.<심의실장>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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