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도 아다시피 이 아빠는 입때것 사치가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유독 필기도구만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 사치는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에 재작년 파리에 갔을 적에 아빠가 맨 먼저 한 일은 워터맨 만년필 구입이었다. 꼭 물건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그 명품속에 담긴 정신에 끌려 오래 전부터 꼭 갖고 싶었었다.오늘날 심각의 극을 치닫는 우리 청소년 문제를 생각하다가 아빠는 문득 어린시절 교회 목사님한테서 들은 만년필의 발명자인 워터맨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나이 먹도록 숱한 난관에 부닥뜨릴 때마다 아빠에게 늘 위로와 용기를 주곤하는 그 이야기를 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다시금 들려주기로 작정했다.
경제대공황이 미국을 휩쓸던 시절, 워터맨은 가난한 보험 외판원이었다. 그는 날마다 가래톳이 붓도록 뛰어다녔지만 화폐가치가 휴지쪽이나 다름없는 미증유의 대공황속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보험에 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해질녘, 정육점 진열창 안의 푸짐한 육고기를 보고 그는 아빠의 귀가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자식들을 생각했다. 오늘은 기필코 고기를 사들고 귀가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그는 어렵사리 정육점 주인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신이 난 김에 그는 펜촉에 잉크를 듬뿍 묻혀 기세 좋게 보험가입자의 이름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슨 비극인가. 굵은 잉크방울이 뚝 떨어지면서 일껏 계약서에 적은 이름위로 퍼렇게 번지는 것이었다. 뭔가 불길한 조짐을 느꼈던지 정육점 주인은 무섭게 화를 내면서 그를 가게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소망의 정점에서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워터맨은 자기가 믿는 신을 원망하고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했다. 밤새도록 번민만 하다가 새벽을 맞게 되었다. 동녘에서 눈부신 햇살이 뻗쳐오는 순간 그는 퍼뜩 깨달았다. 모처럼의 보험 계약에 실패한 것은 참담한 시련을 통해 잘못된 필기도구를 개선하게 하려는 신의 놀라운 섭리임을 섬광처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연구에 몰두한 결과 드디어 잉크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획기적인 새 필기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청소년들의 잇단 자살 때문에 나라가 온통 떠들썩하구나. 들꽃 같은 우리의 어린 생명들이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자살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고 그에 대한 해석도 그만큼 다양하다. 문제는 너무도 쉽사리 죽음의 길을 택하는 생명경시 풍조다. 자기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남의 생명마저 무시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만다.
청소년 문제를 놓고 자식세대를 잘못 기른 부모세대의 책임을 묻는 반성의 소리가 높다. 정말 그렇다. 우리들 부모들은 너희들 젊은 세대에게 참으로 염치없는 세대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저마다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끔 천부의 권리로 태어난 금쪽같은 자식들의 가냘픈 어깨위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란 감당 못할 무거운 짐을 수십년째 얹어주고 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숭상하고 사랑과 우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티없이 자라야 할 너희의 고운 심성속에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얄팍한 처세술을 심어주고 있다. 어른들의 지각이 모자라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던 탓이다. 먹고살 만큼 제법 나라의 셈평이 펴인 지금, 그간 뒤를 안돌아다보고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온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보복을 너희들 세대가 혹독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무렴해지는구나.
얘들아, 정말로 너희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하고 지각없음의 잘못을 범한 어른들을 용서하기 바란다. 어려운 고비는 일단 넘긴 너희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의 청소년 문제에 접하면서 이 아비는 앞으로 사랑하는 자식들의 인생 앞에 놓여있는 무수한 난관과 역경들을 지레 염려한다. 내 강아지들아, 장차 낯선 그 괴물들을 만나더라도 너희는 부디 자중자애하기 바란다. 거기가 곧바로 세상의 끝이 아님을, 외통수 장군에도 반드시 피할 멍군의 길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최선이 아닐 경우 차선을 택하고 때로는 우회할 줄도 아는 것이 현명한 처신임을, 다음번을 기약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웃는 자임을 깨닫기 바란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기 바란다. 비록 당장은 보잘 것 없는 것 같아도 나는 나대로 의미있는 존재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의 우주가 바로 너 자신임을 인정하기 바란다. 스스로 초라하고 왜소한 자신을 발견할 적마다 참담한 실패의 잔을 지혜롭게도 향기로운 성공의 잔으로 바꾼 지난날 그 워터맨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바란다.
내 새끼들, 내 강아지들아, 이 아비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과 신뢰를 너희들에게 보낸다. 누군가로부터, 단 한 사람한테서 만이라도 사랑받고 인정받는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는 법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