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클린턴 미 대통령은 고향인 아칸소주 리틀록을 찾았다. 단순한 고향방문이 아니라 40년전 있었던 한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어린 시절 학교를 다녔던 곳에서 불과 4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40년전 이날 미국의 흑백인종 갈등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긋는 일이 벌어졌다.흑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던 미국의 남부지역에서 대부분 그러했듯이 당시 이 학교에는 백인만이 공부를 할수 있었다. 흑백 인종분리정책에 따라 흑인학생들의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 3년전인 54년 미연방대법원에서 『흑백인종분리정책은 헌법의 인권평등조항에 위배된다』는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중 57년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명의 흑인학생이 이 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주민들의 반대시위속에 입학수속을 둘러싼 흑백간의 갈등은 충돌직전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흑인학생들의 학교접근을 막기위한 목적으로 주지사가 주방위군을 출동시키면서 연방정부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국면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9월25일 공수부대의 투입을 명령, 착검한 공수부대원의 호위속에 흑인학생들의 입학수속을 마치게 했다. 백인학생들의 온갖 박해속에 학교과정을 마친 이들 9명의 흑인학생은 지금도 「리틀록의 9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학교에서의 인종분리정책은 제도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하지만 인종간의 장벽은 아직도 높다. 지금 이 학교에 다니는 1,800명의 학생가운데 3분의 2가 흑인이며 교장도, 학생회장도 흑인일 정도로 상황은 크게 달라졌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끼리끼리 논다고 한다. 92년 LA 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흑인청년 로드니 킹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흑백)는 진정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가?』<워싱턴>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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