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을 온통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던 98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일전이 한국의 승리로 끝난후 두나라의 축구와 관중을 비교하며 화제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 투지 하나로 자수성가한 한국 축구, 투자와 교육으로 키운 일본 축구, 구경꾼 수준의 한국 관중, 프로에 가까운 일본의 축구팬에 관한 얘기는 승패 못지않게 흥미롭다.9월28일 한·일전이 열린 도쿄(동경)국립경기장은 긴장으로 숨이 막힐듯 했다. 그냥 『이기겠다』가 아니라 『죽어도 이겨야 한다』는 두나라의 선수들과 응원단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푸른 유니폼과 깃발로 출렁이는 5만5,000여명의 일본인들속에 빨간 유니폼과 깃발로 작은 섬처럼 떠 있는 5,000여명의 한국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응원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당당함이 홀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일본 관중의 절제가 경기장의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 성냥을 그으면 당장 폭발할 것 같은 경기장 분위기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환호하고 절망했다. 긴장으로 게임이 풀리지 않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 20분 야마구치선수가 첫 골을 넣자 열광하던 그들은 38분과 41분 서정원과 이민성이 잇달아 골을 넣고 눈깜짝 할 사이에 2대1로 역전패하자 침묵으로 패배를 받아 들였다. 경기가 끝난 운동장엔 적막만이 있었다. 야유도 욕설도 없이 그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선수와 관중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 응원팀은 경기가 끝난후 운동장 주변을 돌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꽹과리를 치며 춤추는 한국응원단을 방해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간혹 야유하거나 일본 선수들을 향해 『할복하라』고 소리치는 젊은이들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운동장을 떠났다. 경기시작 5∼6시간 전부터 입장하여 일사불란하게 응원을 연습하고, 표를 사려고 운동장 주변에서 밤을 새우던 그들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놀라웠다.
『초등학교부터 다 합쳐서 한국은 축구팀이 500개이고, 일본은 3만개다. 한국에서는 축구선수들중 해마다 이삼백명이 군대에 가는데, 군에는 축구팀이 하나밖에 없기때문에 7명 정도만이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 문민정부 출범후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폐지했는데, 체육진흥을 위해 부활시켜야 한다. 일본과 중국은 해마다 수십명의 학생을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보내고, 현지에 자기나라 학교가 있어 5, 6년씩 마음놓고 축구를 배우지만, 한국 학생들은 현지에 학교가 없어 6개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 한·일 양국의 축구에 대한 투자와 성원은 비교가 안된다. 그런 악조건속에서 거둔 승리라 더욱 값지다』
운동장에서 만난 축구협회 사람들은 투혼으로 뛰는 한국 축구가 과학적인 훈련과 투자로 육성하는 일본 축구를 계속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중요 경기에서 이기고 질 때마다 비난과 환호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곧 잊어버리는 우리나라 풍토를 그들은 안타까워 했다.
2002년 월드컵과 한·일축구전을 보는 일본인들의 눈은 매우 현실적이다. 아디다스와 제휴하여 국가 축구팀의 유니폼을 만들고 있는 데산토회사의 가가야 도요아키(가하옥풍소) 영업부장은 일본팀이 자꾸 이겨야 월드컵 특수가 뜨거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전체 스포츠시장은 연 2조엔, 축구는 800억엔 규모인데, 2002년 월드컵이 적어도 10%이상의 신장을 가져오고, 다른 산업에도 구석구석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이번 한·일전을 앞두고 그의 회사는 선수단 유니폼과 같은 푸른 티셔츠를 얼마나 만들까 망설이다가 확신이 서지않아 8,000장을 내놨는데, 1만1,000엔(8만3,000원)짜리가 순식간에 매진됐다고 한다. 일본이 이겼다면 수만장을 팔 수 있었을 거라고 그는 아쉬워했다.
『한국 축구가 확실히 강해요. 한국 선수들은 끝까지 스피드와 박력이 떨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에 도쿄에서 이겼으니 11월1일 서울에서는 좀 져달라고 말해 주세요. 서로 이기고 지며 2002년까지 사이좋게 가야지요』
가가야씨는 애교있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잠실 경기장의 관중이 운동장의 평화를 지키는 일만은 반드시 해야 한다. 축구는 축구지 두 민족의 전쟁이 아니다. 두 나라 관중의 수준에서 또 하나의 승부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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