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의 당위성보다는 합종연횡을 바탕으로 득표전략따라 말바꾸기이번만큼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개헌 논의가 활발했던 적이 없었다. 대선 후보들은 그때 그때 유리한 「개헌 카드」를 내밀고 있다.
개헌 논의가 유권자의 반발을 살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다. 개헌 논의의 내용에 따라 후보간 합종연횡의 향방이 정해지고, 지역 구도에 바탕한 표심이 개헌 논의에서조차도 자기뜻대로 따라올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개헌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은 수시로 「당당하게」 바뀌어 왔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는 94년 2월 총리 재임시 『직선제에 의해 탄생한 정부다. 내각제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으며 지난 3월 대표취임 후에도 내각제 개헌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병역 정국」을 거치며 지지도가 하락하고 이인제 전경기지사가 탈당하는 등 위기상황을 맞자 지난달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제도는 다원화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후 『집권하면 임기중 개헌도 가능하다』고 상당히 적극적인 개헌의사를 내비쳤다. 「내각제 지지세력 껴안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71년 7대 대통령선거때부터 줄곧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해 왔다. 특히 90년 1월 3당합당에서 내각제 추진이 비밀리에 약속된 것으로 드러나자 김총재는 총선때마다 늘 「개헌 저지 의석」을 호소했다. 그러나 정계은퇴 선언후 95년 6월의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개헌에 대한 민심을 한번쯤 알아 볼 시기가 됐다』며 『지방선거 후에는 이 문제가 쟁점이 될 것』이라고 내각제 개헌도 검토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지방선거 압승을 발판으로 정계에 복귀한 지 두달만에 다시 대통령중심제를 강조했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중심제가 좋고 의원내각제는 위험할 수 있다. 남북대결상황에서는 임기 5년이 보장된 안정된 정권이 북한과 협상해 나가야 한다. 내각제하에서는 재벌이 의원을 산하에 거느릴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지난해 15대 총선에서도 『김영삼정권의 내각제 음모를 견제할 힘을 달라』고 주장했던 김총재는 김종필 자민련총재와의 후보단일화 전략과 관련, 『정권교체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는가 하면 아예 「임기중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자민련 김총재는 90년 이래 줄곧 내각제를 주장해 왔고 95년 창당과 동시에 자민련 정강에 내각제를 못박았다. 김총재는 『김영삼대통령이 내각제를 결심해 국민투표에 부치면 협조할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대선연기도 가능하고 개헌을 위한 시간은 충분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내각제를 공유하는 어떤 세력과도 연대할 수 있지만 이회창 대표는 제외한다』고 밝히는 등 정치적 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다.
조순 민주당총재는 지난달 『현행 대통령제는 2년만 지나면 권력누수현상이 생기므로 4년 중임제로 바꿔야 한다』고 제의했고 이인제 전 경기지사도 『내각제는 국가를 망치는 길』이라며 『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고 밝히고 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시민들 반응/‘사업구상 내듯’에 짜증/“대선후보들 마음대로 정하고 국민에 사후동의만 구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회사원 김동훈(33·서울 면목동)씨. 『12월 선거가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입니까, 대통령 선거입니까? 요즘 정치판 돌아가는 걸 보면 대선 후보들이 나라의 큰 문제는 모두 자기들이 정하고 국민들에게는 그저 사후 동의만 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중소기업인 이영일씨(46·서울 일원동). 『헌법은 나라의 근간인데 무슨 사업 아이디어 내듯하니 짜증이 날 수 밖에요. 쉽게 꺼냈다가 쉽게 취소하는 걸 보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또 말을 뒤집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어요』
내각제에서 이원집정부제와 4년 중임 대통령제까지 다양한 개헌논의가 정치권을 달구고 있지만, 정작 국민들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다.
개헌 여부를 묻는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잘 모르겠다」 「뭐라 얘기할 수 없다」는 응답이 3분의 1 수준에 이르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는 느껴진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권력구조 개편 및 개헌 문제가 아직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유권자운동연합 진영오 정책실장은 『나중에야 어찌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선 이기고 보자는 정치권의 행태가 국민들의 무관심과 염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장은 또 『통일 이후를 겨냥한 장기 구상에 따라 신중히 다뤄야 할 개헌문제가 정권 획득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려 자칫 부실·졸속 개정을 부를 우려까지 낳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이 「바른 대통령 만들기 범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각당 개헌안을 비교, 타당성을 따지는 공청회를 열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공명선거실천 시민운동협의회 김기현 사무차장은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때는 딴전을 피우다가 권력 재편기에 불쑥 헌법개정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만 봐도 각 정당의 속셈을 알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개헌 논의는 모든 잘못과 부패의 원인을 권력구조 문제로 돌림으로써 마치 제도만 고치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그릇된 인식을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낳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손봉숙 소장도 『정권장악을 위해 개헌문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헌법개정이 그렇게 긴요하고 절박한 사안이라면 변죽만 울릴 것이 아니라 하루 빨리 대선공약에 못박아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라고 말했다.<황동일 기자>황동일>
▷헌법개정절차◁
1. 국회(재적의원 과반수)나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
2. 발의된 개헌안을 20일 이상 공고하고 60일내에 국회 표결. 재적의원 2/3이상의 찬성으로 의결.
3. 국회 의결 후 30일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개헌안 확정
◎전문가 기고/장석권 단국대 교수·한국헌법학회장/필요성 여부를 떠나 대선 70여일 남기고 개헌논의 타당한지 짚어보아야
대통령 선거가 80일도 남지 않은 요즘 정치권은 개헌론과 권력분산론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개헌의 필요성 여부를 떠나 시기적으로 현재의 개헌논의가 적절한 것인지를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란 법률이 국민생활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 법률을 개정해야 하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헌법이 장애가 된다면 헌법 역시 개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홉번에 걸친 우리 헌법의 개정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의한 졸속적인 개헌이 자유민주주의 실현에 얼마나 큰 장애가 돼 왔던 것인가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현행 헌법으로의 개정은 시민혁명적 「6·10항쟁」의 승리로 얻어 낸 「6·29」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이 10년만에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집권욕 때문에 다시 만신창이가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헌법은 결코 정권 연장이나 집권을 위한 편의적인 도구가 아니다. 앞으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면 당리당략을 떠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할 수 있다. 미국식 대통령제가 됐든, 영국이나 독일식 의원내각제가 됐든, 아니면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가 됐든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어떤 것이 과연 우리 실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는데 알맞는 것인지를 연구하게 하고 여론으로 여과해 그야말로 국민적 합의하에서 개헌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부 대통령후보는 개헌 주장은 아니라면서 내놓고 있는 권력분산론이나 책임총리제도 위장된 개헌 주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헌법 제61조 제2항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우리 헌법상의 국무총리나 국무회의는 스스로의 권한을 전혀 갖지 못한 보좌기관이다.
개헌을 하지 않고서는 독자적인 권한을 가질 수가 없는데 어떻게 책임을 지는 책임총리가 될 수 있으며, 독자적인 권한을 갖지 못한 기관을 어떻게 독립시켜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얘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백보를 양보해서 권력 분산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대통령의 시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대통령의 자의에 의해 환원될 수 있고 그 경우 아무런 저항수단이 없다. 결국 이런 주장은 그럴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란 정치지도자의 개인적인 역량이나 시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제도에 의해 정치와 행정이 객관적으로 행해지는 정치체제다.
정치권은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도 좀 더 진실해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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