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절필을 접고 다시굴리는 수레바퀴/‘저주스런 글쓰기의 굴레’/운명에 대한 성찰의 기록/“삶의 깊이가 스민 작품들”「부랑의, 내 문학」. 작가 박범신(51)씨는 자신의 문학을 그렇게 말했다. 21년간 쉬지 않고 원고지 6만매를 메워오며 대중적 인기의 절정에 있던 작가. 그러다 93년 겨울 어느 새벽 울면서 『이제 내 상상력의 불은 꺼졌다』는 유서 같은 절필의 변을 내놓고 글쓰기를 중단했던 박씨.
박씨가 4년만에 묶어낸 연작소설집 「흰 소가 끄는 수레」(창작과비평사 발행)는 한 작가의 죽음과 재생의 기록이다. 형식은 소설이지만, 도대체 글쓰기가 무엇이고 무엇에 바쳐져야 하며, 작가는 왜 그 저주스런 글쓰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가 하는 운명에 대한 근원적 성찰의 기록이다.
『더 쓰다가는 죽을 것 같은』 사멸의 위기감을 느낀 베스트셀러 작가가 어느날 무작정 해인사로, 무주로 방랑한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면도칼은 자멸하고픈 유혹의 상징이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흰 소가 끄는 수레」라는 화두였다. 해인사 대적광전 뒷문의 불화에 그려져 있는 흰 소가 끄는 수레. 『수천억겁, 불멸의 별들을 오가는 수레가 있다면, 아마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을 터, 그 수레에선 빛과 어둠이 한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이 한사코 아니다, 모른다, 부정하는 건 집착 때문이오. 부처가 별 거요?』
사멸의 위기감마저도 불멸에 대한 집착에서 온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욕망이었다. 작가는 해인사에서 만난 한 사나이의 말에서 이를 깨닫고 용인 굴암산 자락에 시골집과 텃밭을 마련, 글을 끊은 채 3년을 살았다. 그러다 『속에서 물이 차기를 기다려』 『굴암산 시린 정령들이 내 안에 쑤와아, 쏟아져 들어와』 쓴 것들이 「흰 소가…」 연작 5편이다. 절필선언 직전의 감회를 담은 「그해 내린 눈 지금 어디에」까지 6편의 작품은 수미상관한다.
가족과 삶에 대한 눈도 새로이 떠졌다. 팔팔하던 20대 인기작가는 어느덧 오십줄에 들어섰고 세 자녀도 다 장성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버지를 둔 아들의 고뇌, 자신의 젊은 시절처럼 청춘의 신열을 어쩌지 못하고 한밤중에 차를 몰고 나가 질주하는 입시생 아들, 한총련 연세대 점거농성에 참여해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딸…. 이들과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작가는 평상심과 삶의 깊이를 획득해 간다. 문학평론가 김치수(이화여대 교수)씨는 『일상적 자아를 발견한 이 작가의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은 풍랑을 이기고 불멸의 욕심을 버린 작가적 깨달음만이 아니라 평상심의 상태에서 삶의 깊이를 획득해 가는 평온한 관찰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씨는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한 매듭으로 하고 『다시 재미와 감동을 함께 주는 작품을 행복하게 쓰고 싶다』고 말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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