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통령선거에는 여야 두 진영의 선명한 패싸움이 벌어지기보다는 다섯도 더 되는 주체성 불투명의 정당후보와 무소속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대통령 지망생들의 난투극으로 일찍이 없었던 혼전이 예상된다. 이른바 「합종연횡」의 가닥이 잡힌다고 해도 너무 복잡하여 출마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정체마저도 애매모호하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심리적 혼란에 빠질 것이 명백하다.유권자들의 그런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한다. 투표 1주일 전까지 후보자마다 자신이 당선되면 구성할 내각의 각료 명단을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국민 앞에 밝히라는 것이다.
이 명단은 후보가 임의로 작성할 수 없고 반드시 총리나 장관이 될 사람들의 취임동의서가 첨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의 승낙없이 명단이 공개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현행 헌법에 따라 어차피 대통령은 선출될 것인데 설사 내각책임제 개헌이 15대 대통령 임기중에 단행이 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그때까지는 국무위원을 임명해야 한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헌법의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원하기만 하면 서리로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나 장관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나가며 조그마한 업적이라도 하나 남기고 물러나려면 최소 2년의 세월은 필요하다고 보는데 김영삼정권 하에서는 공보처를 맡은 장관 한 사람만이 대통령 취임일로부터 이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모든 언론을 매우 교묘하게, 그리고 매우 철저하게 관리·단속해 왔을 뿐―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이 오늘 저런 곤경에 빠졌다고 나는 믿고 있지만―단명한 장관들 중에는 불과 며칠 또는 몇주 밖에 장관노릇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따라서 『내각 있으나 마나』라는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깊은 생각없이 장관을 임명했다가 깊은 생각없이 장관의 목을 잘랐다고 밖에 풀이가 되지 않는다. 실력이야 있건 없건 선거때 신세 진 사람, 사돈의 8촌, 고등학교 후배 등에게 장관될 기회를 마련해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둘째 아드님과 줄이 닿아 요직에 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 일들이 오늘의 비극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대통령 후보중의 어느 한 후보가 집권하면 청와대를 축소시키겠다고 약속했는데 호감이 가는 공약이다. 기라성같은 국무위원들이 자리잡고 있다면야 청와대가 방만한 권력행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 아니한가. 청와대와의 알력이나 마찰 때문에 맡겨진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난 총리나 장관이 한 두 사람 뿐인가. 이회창씨가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고 오늘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될만큼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된 것도 그가 총리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청와대의 홀대를 견디다 못해 『날 뭘로 아는거요!』하며 사표를 내던졌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과거 어느 정권에서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던 한 경제학자가 청와대의 경제수석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아 얼마 뒤에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식견이 뚜렷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통령 가까이 있으면서 그의 귀를 붙잡을 수 있는 비서가 승리하게 마련인데 비서정치의 폐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대통령 혼자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가 장관들과 함께 나라의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대통령의 공약만을 믿고 찍어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이 어떤 사람들과 손잡고 일할 것인지 미리 알아야겠다. 후보마다 사전 조각을 하고 그 명단과 더불어 내각의 사진이라도 한장 함께 찍어 국민 모두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당선되면 누구와 일을 함께 할 것인지―그것이 알고 싶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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