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교과서연구’ 인내심 가져야/잘못된 역사는 떳떳이 인정/정치떠난 학문적 접근 우선/독·불 관계사 논쟁 이미 끝나/이웃 미워해선 미래도 없어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독일위원회는 공동으로 24,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21세기 역사교과서 국제포럼」을 개최한다. 포럼에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핀란드 일본 한국 등 6개국 학자 18명이 참가, 국가간 역사교과서 공동연구사례를 발표하고 이를 한국과 일본의 공동연구에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참가자 중 라이너 리멘슈나이더 박사는 독일 게오르크 에케르트 국제교과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협력을 위한 조건과 그 의미―1935∼91년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 교과서 협의 비교연구에서 나타난 몇가지 결론」을 주제로 발표한다. 그를 만나 독일의 경험과 지혜를 들어봤다.<편집자 주>편집자>
□대담=이광일 기자
―게오르크 에케르트 연구소는 어떤 곳입니까.
『국제 교과서문제 연구기관으로 75년 독일(당시 서독) 특별법으로 설립됐습니다. 재원은 80%가 정부지원금이고 나머지는 여러 재단에서 지원합니다』
―게오르크 에케르트박사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브라운슈바이크대 역사학 교수였는데 2차대전 종전 후 프랑스 폴란드 영국 등과 역사교과서 공동연구를 주창한 분입니다. 이웃나라와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기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요. 2차대전 때 독일군으로 그리스전선에 출전했다가 그곳 지하운동단체와 연결을 갖는 등 반나치활동을 펼쳤습니다. 40년대말부터 사설연구소를 세워 활동했고 52년에는 일본학자들과 같은 패전국의 입장에서 전후 처리문제 등을 논의하기도 했지요. 현재 연구소는 그가 설립한 사설연구소의 후신입니다』
-40, 50년대에 독일인으로서 프랑스나 폴란드와 교과서 공동연구를 추진했다면 국내에서는 말이 많았을텐데요.
『좌파인 사민당(SPD) 소속이라 그렇다는 등 비판이 많았지요. 패전국으로서 다른 나라와 역사교과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약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았습니다. 에케르트 박사의 활동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활동에 동조하는 세력도 당시에는 수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수였지요. 그러나 60, 70년대 들면서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의 노력은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프랑스와의 교과서 공동연구는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습니까.
『양국 관계사 부분의 논쟁은 끝난지 오랩니다. 지금은 산업화 문제와 하나로서의 유럽에 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51년 교과서협의를 재개하면서 이미 유럽의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했지요. 프랑스와는 2차대전 전인 1935년에 이미 파리에서 학자들이 첫 회의를 갖고 양국 관계사연구에서 합의 및 미합의 사항 39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양국 역사학자, 교사들이 교과서를 집필하거나 가르칠 때 반영토록 했습니다. 이어 51년 「유럽역사의 논쟁점에 대한 독일-프랑스간 합의」를 채택했습니다. 이후 88년부터 새로운 차원에서 교과서 협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와는 어떻습니까.
『70년대에 시작해 지금은 두 나라 학자, 교육자들이 교사용 지침서를 공동집필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와도 원래는 2차대전 전에 교과서 공동연구를 시작했지만 45년 이후 동서냉전으로 단절됐습다. 그러다가 72년 양국 유네스코 위원회 주관으로 협의를 시작, 독일-프랑스 전례를 참조해 교과서 집필·강의를 위한 권고를 채택했습니다. 당시 이 권고 내용은 독일의 경우 지방의회, 대중매체, 학교 등에서 활발히 토론됐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사용 지침서는 어떤 특정 사안의 경우 독일이 잘못했다, 폴란드가 잘못했다 등 가치판단 부분도 기술합니까.
『물론입니다』
―이견은 없나요.
『왜요, 토론과정에서는 많이 싸우지요. 그러나 정치적인 판단이 아니고 순수하게 학문적인 토론입니다』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가 70년 폴란드를 방문하는 등 동방정책을 추진한 것이 양국의 교과서 공동연구에도 도움이 됐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브란트가 바르샤뱌 무명용사비 앞에서 무릎꿇고 독일의 잘못을 사죄한 것은 가장 상징적인 전환점이 됐습니다』
―프랑스나 폴란드와의 교과서협의에 많이 참가하셨는데 독일인으로서 조국의 잘못을 인정해야 할 때 괴롭지 않던가요.
『날마다 잘못했다고 할 수야 없지요.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우리도 전후에 좋은 일을 한 게 많으니까 그런 부분은 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과거를 보기보다 앞으로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요』
―협의과정에서 토론을 해보시니 어떻던가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기도 하고 가슴아픈 문제를 끄집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대립이 심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다보면 인간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상대방의 입장을 차츰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소중합니다』
―프랑스와 폴란드를 제외하고 다른 국가와의 협의는 없나요.
『현재 체코와 토론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체코와는 68년 교과서 공동연구를 시작했는데 잠시 중단됐다가 87년 재개됐습니다. 독일의 침략 부분과 체코 거주 소수 독일인 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견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 학자 모두 역사학파간의 견해차여서 정치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프랑스나 폴란드와 공동연구를 할 때 처음 제안은 독일에서 했습니까.
『독일에서는 에케르트나 에노 마이어 같은 학자들이 시작했고 프랑스나 폴란드에서도 자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2차대전 기간에 이미 평화주의자들의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누가 먼저 했다고 하기는 어렵군요』
―한국과 일본도 교과서 공동연구를 막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럽의 경험을 보면 교과서 공동연구는 처음에 아주 개인적인, 학자적인 차원에서 시작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정치를 떠나서 학자끼리 토론하는 구조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전쟁책임을 사죄하고 유대인 전쟁피해자 보상 등 할 일을 했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문에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는데….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 두번 해보고 잘 안된다고 그만둬서는 안됩니다. 제 경험으로도 길고 지루하고 같은 얘기 또 하고, 회의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토론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그동안 무의미한 것 같던 토론 내용이 어느 순간 갑자기 중요해집니다』
―독일―프랑스에 비하면 일본―한국 관계는 총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잘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문화와 역사 등 여건이 다르다고 봅니다. 독일도 100년전에 이웃나라들과 교과서 문제를 토론했다면 민족주의 때문에 잘 안 됐을 겁니다. 아시아쪽 사정은 잘 몰라 뭐라 답하기 어렵군요. 다만 토론과정에서 서로 이견이 있는 부분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두기만 하는 것도 성과입니다』
□약력
▲42년 독일에서 출생 ▲60년대 괴팅겐대와 프랑스 파리대에서 역사학과 불문학, 교육학 전공(파리유학 때 만난 프랑스여성과 결혼) ▲69년 괴팅겐대 철학박사, 프랑스 캉대에서 역사학 강의 ▲76년부터 게오르크 에케르트 국제교과서연구소 연구원으로 프랑스, 폴드 등과의 교과서 공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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