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고 오락도 아니고 섹스도 아니고 오로지 정치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추석에 성묘를 가고 차례를 지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과연 15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뜻밖에도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잘 달리고 있다고 한다. 여론조사마다 선두를 지키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92년 대선에 실패하고 영원히 정계를 떠난다고 했을 때 그의 결단에 경의를 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국민과의 그 언약을 저버리고 정계에 다시 복귀하여 멀쩡한 야당 하나를 박살을 내고 나가서 자기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 하나를 만들었을 때 제 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한 사람들이 또한 많았다.
남은 한번 출마해 보기도 어려운 대통령선거에 세번이나 출마하여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다시 4번째 도전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대학입시도 세번쯤 떨어지면 아예 포기하는 것이 관례인데 만일 네번째 도전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 배짱이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7순을 넘어선 노구를 이끌고 청와대를 향해 다시금 돌격을 시도한다니 분명히 제 정신은 아니라고 우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김대중씨가 결연한 자세로 말을 몰아 청와대라는 험난한 고지를 향해 돌진하는데 그가 탄 말이 계속 1위로 달리고 있다면 놀랄만도 하지 않은가. 추석이후 동아일보 조사에서도 1위, 조선일보 조사에서도 1위, 한국일보 조사에서도 1위라고 한다면 여론의 향방이 그렇다고 믿을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러나 국민회의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14대 대통령선거를 한번 돌이켜 보자. 만일 선거전의 막바지에 가서 『정주영 찍지 말라. 이러다간 김대중 대통령 된다』라는 허무맹랑한 말만 나돌지 않았다면, 정주영 후보가 김영삼 후보의 표를 200만표 정도는 깎아 먹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김영삼씨의 표는 200만표 가까이 줄어 들어 김대중 후보가 무난히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김대중씨는 『이번에도 또 안될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한 속에서 14대 대통령선거의 마지막 뚜껑을 열어젖혀야 했는데 『이러다간』 운운하는 신문의 칼럼 한 편이 대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승기자염지라는 옛글이 있다. 이길 것 같은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인간 심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동시에 약자를 도우려는 묘한 의협심을 간직하고 태어난 동물이다. 자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두 축구팀이 접전을 벌일 때 우리는 약한 팀을 응원하게 되는가, 강한 팀을 응원하게 되는가. 정치에 있어서 특히 선거라는 주권행사의 과정에서 유권자는 너무 강한 후보를 돕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난번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드디어 이회창 후보가 승리를 쟁취한 직후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일시 51%를 넘었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어떤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강자를 싫어하는 인간심리 때문이다.
한 평생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했던 김대중씨에게 천재일우의 호기가 찾아든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저렇게 지리멸렬한 때도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연이어 영남에서 대통령이 세 사람이나 탄생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번만은 아직 경상도의 후보가 없지 아니한가. 영남 출신의 후보를 급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동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러나 동정처럼 아름다운 감정은 없다. 동정처럼 필요한 감정은 없다. 특히 정치의 미학은 동정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바탕에 깔고 전개돼야 멋이 있다. 우리 정치가 멋을 잃은 까닭은 정치인들이 동정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남사람 900만 중에서 500만명이 호남출신인 김대중 후보에게 순수한 동정심을 품게 될 때 김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고 또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김대중 후보는 지금 청와대의 대문 앞에 섰다. 겸손하면 그 문이 열릴 것이고 교만하면 그 문이 영영 닫힐 것이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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