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은 부러지고 돛은 망가지고 식수마저 떨어져 처절한 사투/일행중엔 자살하려는 자까지 “마패·상복 갖춘채 이젠 천명에…”최부의 표해는 장대한 인간드라마였다. 그의 붓끝에서 동서와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의 격」이 눈에 잡힐듯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인간의 모습은 최부를 포함한 일행 43명이 오로지 바다의 풍랑에 목숨을 내맡기고 있던 최초 14일간의 표류기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인간군상의 애와 증, 지와 무지, 공과 사의 문제가 집약돼 있는 곳이 바로 「표해록」의 이 부분이다.
최부가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고향 나주를 향해 제주를 출발한 것은 1488년(성종 19년) 음력 윤 1월3일. 제주목사 허희는 『관의 배보다 튼튼하고 빠르다』며 수정사 지자 스님의 배를 알선해 준다. 출항지는 조천관 부두. 이 때는 환절기라 동계 계절풍인 「편북(동)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년 중 해난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 때문에 제주도 풍속은 2월1일부터 15일까지 풍신제사를 지낸다.
이번 항해의 운명을 예고나 하듯이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였다. 상륙지인 해남까지의 뱃길은 이틀길. 포구에 전송 나온 학장 김존려와 김득례는 출항을 만류했다. 『우리 늙은이들은 섬에서 자랐기 때문에 뱃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한라산의 기후가 고르지 못하면 틀림없이 폭풍으로 변하는 수가 많아 바다를 건너는 것은 몹시 위험합니다. 「가례」에도 이르기를 먼곳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리 황급하더라도 밤에는 쉬어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호송원인 진무 안의 등은 『사사로운 배가 뒤집혀 가라앉는 예가 허다하였지만 나랏일을 수행했던 신하가 표류했던 적은 없다』며 출항을 고집했다. 그러나 제주 북쪽 근해의 대화탈도를 지나면서부터 일행의 운명도 험한 바다처럼 격랑에 휩싸였다.
첫날 추자도 가까운 초란도에 일시 정박했던 배의 닻이 거센 풍랑에 부러졌다. 군인들은 배를 띄운 것을 원망하며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틀째, 돛대 2개마저 넘어간 배는 종이배처럼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같이 기우뚱거리며 자꾸만 먼바다로 흘러갔다. 최부는 배 안의 물을 퍼 내고 배를 수리하도록 명했으나 군인들은 무모했던 출항을 원망하며 거부했다. 「매질을 해도 그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송진 같은 용렬한 사람은 매를 맞고는 어째서 빨리 배가 부서지지 않는 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부도 「이제 물에 빠져 죽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고 참담하게 적고 있다.
최부는 일행을 점검했다. 자신을 포함해 호송원, 기록관, 키잡이, 뱃사공, 호송군, 관노, 자신의 개인 종까지 43명이었다. 최부는 명령을 거부하는 호송군들에게 호소한다. 「이 일은 모두 나 때문에 당하는 일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은 것일세. 자네들은 부모형제가 애끓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음을 망각한 채 귀중한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공연히 나만 책망하면서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스스로 죽음의 길에 빠질 것이네」
그러나 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의지를 한없이 무력하게 했다. 관노 오산은 끈으로 목을 매 자살하려다 제지당한다. 출항을 고집했던 안의조차 『짠물을 들이키고 죽느니 스스로 죽는 편이 낫다』며 활시위로 목을 매려 했다.
표류 사흘째인 윤 1월5일, 최부는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위의 말에 따라 인신과 마패를 가슴에 품고 상복을 갖추고 천명을 기다리기로 한다. 부친을 선산에 모신 다음 죽음을 달라고 하늘에 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일행은 다시 감복한다.
식수조차 떨어졌다. 빗물을 받아놓았다 마셨으나 그마저 떨어져 입술조차 축일 수 없게 되자 일행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할 수 없이 마른 쌀을 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오줌마저도 잦아 들었고, 가슴이 건조해져 말도 나오지 않는 처절한 참상이 일어났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간혹 보이는 물새 몇마리만이 육지가 가깝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새들은 어느 순간 어디론지 사라져버릴뿐, 성난 바다는 여전히 그들을 괴롭혔다. 표류한 지 여드레가 되던 윤 1월10일, 낙엽같은 배는 아직도 중국과는 먼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 앞에는 표류의 고통보다 더 험악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중국닝보·영파에서)>박태근>
◎“선장과 뱃사공들은 모두 통곡만… 이제 남은 것은 바닷물에 젖은 옷가지와 책뿐”
윤 1월5일. 『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허물로 벌이 제 몸에 미치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만 배에 타고 있는 40여명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하여 주소서』
윤 1월7일. 선장과 뱃사공들은 모두 통곡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알고 홑이불을 찢어 몸을 여러번 둘러 감은 다음 배 가운데 있는 나무에 묶었다. 사후에라도 시신이 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윤 1월9일. 허상리 등은 절망적인 눈물을 흘리면서 『(배의) 보수에 전력을 다하고 싶으나, 물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수족은 마비되었으며, 몸은 가눌 수 조차 없어 그 역시 쉽지 않으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하며 한탄하고 있었다.
윤 1월10일. 선실 내의 짐꾸러미를 조사하도록 시켰더니 감 50여개와 술 두동이가 나왔다. 손효자는 지시에 따라 사람을 살펴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사람에 한하여 고루 나누어 마시게 하였으나 그것도 부족하여 금지령을 내렸다. 안의가 『옷을 빗물에 적신 다음 그 옷을 짜면 물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그렇게 해보려고 하지만, 입고 있는 옷 모두 짠 바닷물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즉시 옷 두서너 벌을 거두어 최거이산으로 하여금 옷을 비에 적신 다음 그 물을 짜 저장하였는데 거의 두서너 병에 이르렀다. 다시 김중에 명하여 그 물을 관리하도록 하고 숟가락으로 나누어 마시도록 하였다.<최홍기 역 「표해록」 중에서>최홍기>
◎표해록의 가치/뛰어난 문필력에 당시상황 생생히/문학적·정신사적·사료적 가치 출중
최부의 「표해록」이 갖는 의의와 가치는 크게 보아서 다음 세가지라고 할 것이다.
첫째로 문학적 가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이기도 하나 15세기 말엽의 동아시아에서는 바다길은 거의 막혀있던 때여서 더욱 문학 소재로서는 드물다 하겠다. 거기다가 저자 최부가 제주도에서 뱃길에 나설 때부터 폭풍을 만나고 남부 중국 관리들과의 교섭에서 온갖 고난을 겪었던 것이 극적이었고, 단순히 살아돌아온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소재가 극적인데다가 저자 최부의 학문지식과 문필력이 뛰어났던 것이 이 표류기의 가치를 크게 높혀주고 있다. 아마도 여행 중에 미리 필요한 사항들을 적기해 두었다고 짐작되지마는 귀국해서 수일에 써내 놓은 작품으로서, 드물게 내용이 충실하며 문장이 간결하고 힘이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정신사적 가치. 저자가 뱃사람들을 거느리고 갖은 역경을 뚫고 나오면서도 단순히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조선조의 선비와 관리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정신적 자세가 역력히 나타난 점이다.
특히 중국측과의 교섭에서도 불리함을 무릅쓰고 당당한 관복을 입지 않고 꼭 상복을 고집하는 등 선비학자로서의 기질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사료적 가치이다. 당시의 남부 중국은 조선인으로서는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어서 풍광과 습속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또 중국으로서도 외국인 지식인이 이렇게 직접 목격하여 기술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에, 이 표해록은 명대 중국의 연구사료로서도 큰 가치를 지닌다.<고병익 전 서울대총장>고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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