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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봄날이나 가을날의 사랑/김용택 시인(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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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봄날이나 가을날의 사랑/김용택 시인(시작노트)

입력
1997.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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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 봄에 한 편의 시를 쓰고 여지껏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시인이 시를 못쓰면 물론 시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쓰여지지 않는 시를 어거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시란 늘 산만큼 쓴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살아가면서 시가 마음에 고여 넘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쓰여지면 쓰고 그렇지않으면 그냥 산다. 시가 내 자연스러운 삶을 불편하게 하거나 방해하면 안되리라. 나는 대개 이른 봄부터 잎이 다 우거진 초여름까지 시를 쓰고 그리고 죽 놀다가 새학기가 시작되는 초가을에 주로 시가 쓰여지는 편이다. 구월이 아직 오기 전에 나는 강에 가는 길에서 새하얀 구절초 꽃 몇 송이를 보면서, 샛노래지는 벼와 고개 숙이며 생각으로 익어가는 곡식들과 호박꽃이나 해바라기꽃들을 보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 그 어떤 것들이 마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풀잎에 이는 바람결에서 쓸쓸함과 슬픔을 보았다. 내게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잠결에 구절초꽃이 보였고, 느닷없이 지리산과 섬진강 하얀 모래가 생각나기도 했다. 가을 시를 쓰고 싶었다. 어느 여인에게 아름답고 슬픈 편지를 시로 쓰고 싶었다. 가볍게 물드는 낙엽들, 도랑가에 피어나는 풀꽃들, 산그늘 내리는 저문 마을의 시정이나, 쓸쓸한 강가의 그 길에 대해서 편지 형식의 글을 쓰고 싶었다. 몇 번 이런저런 글을 시도해봤지만 너무 상투적이고 낡은 표현들이어서 조금 불안했다. 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면 내 옛 시 냄새가 너무 났다. 나는 견뎌보기로 했다. 내 체험과 버릇에 의하면 어느 순간 느닷없이 뜻하지 않은 시가 너무나 쉽게 쓰여진 일이 너무 많았고, 또 그렇게 느닷없이 쉽게 쓰여진 시가 성공적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뒷산 솔숲이 생각났고 그 솔숲 아래 작은 참나무와 그 참나무 밑에 떨어진 햇살들이, 이슬이 생각났다. 나는 엉뚱하게도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란 시의 첫줄을 썼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이 내 마음을 따라가 보았다. 이 시는 그렇게 엉뚱하게 쓰여진 봄과 가을의 냄새가 약간 섞인 시이다. 이 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시의 끝부분 쯤에 예고없이 나타난 「사랑합니다」란 구절이다. 그 사랑은 왠지 쓸쓸하고 크고 높고 아름답고 넓은 사랑 같다. 끝없는 그 어떤 봄날이나 가을날의 사랑 말이다. 이 시는 초봄 이후 처음 쓴 내 처녀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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