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논리가 반영된 부실심의 집행단계선 쓸데없는 곳 사용/업자와의 유착·부당전용 등 지난해 추징·회수보전액만도 무려 4,269억원에 달한다예산이 새고 있다. 공식확인된 것만으로도 지난해 국민 한사람에 1만원꼴인 4,269억원의 예산이 샜다. 실제 그 몇배의 돈이 새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예산 편성·집행 과정에 「국민의 피땀어린 돈」을 만진다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고 결과에 대해서도 명백한 비리가 아닌 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따끔하게 묻지 않는다. 그런 틈새로 국민의 혈세가 끊임없이 새고 있다.
우리 예산은 편성단계에서부터 구멍이 나 있다. 각 부처는 턱없이 많은 예산을 요구해 예산당국을 혼란에 빠뜨린다. 따 놓기만 하면 「내 돈」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데다 많이 요구하면 많이 받는 묘한 관행이 뿌리깊다.
올해도 마찬가지. 환경부 통상산업부 중소기업청 등 11개 부처가 올해보다 50% 이상 많은 98년도 예산을 요구했다. 농림부는 무려 99.1%의 증액을 요구했다. 대부분 신규사업이 이유였다. 각 부처는 언제부터인지 신규사업을 가장 효과적인 예산확보 수단으로 삼아 왔다. 일단 시작만 하면 끝날 때까지 자동으로 돈이 굴러 들어 오기 때문이다.
한 경제부처 예산 담당자. 『신규사업을 여러 가지 신청했다가 한 두개라도 건지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껏 요구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지요. 첫해 예산만 확보하면 사업이 끝날 때까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일선 부처는 재경원의 사정을 통과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재경원은 상투적인 속임수를 알아 채고도 눈감아 준다. 사업비를 일부러 낮게 책정, 우선 예산을 배정받고는 다음해부터 사업 규모와 내용을 변경해 돈을 늘려 나가는 수법이 가장 흔히 쓰인다. 『지반이 약해서』 『의외의 민원이 돌출해서』 등의 켸켸묵은 변명이 여전히 통한다.
경부고속철도사업이 대표적인 사례. 90년 첫 발표때 5조8,400억원이었던 총사업비가 수차례의 사업계획 변경을 거친 끝에 3배로 늘어 난 17조6,294억원으로 조정됐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늘 사업비가 두 배 이상 늘어난다』는 점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관련 부처나 재경원이야 『할 수 없는 일 아니냐』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는 사기나 다름없다.
또 여건이 크게 바뀌어 사업을 중단해야 하는데도 그대로 예산을 확보한 뒤 다른 용도로 전용하기도 한다.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용 단말기 1,000만대 보급사업(총사업비 6,000억원)을 88년부터 추진해 왔다. 퍼스널 컴퓨터(PC)의 급속한 보급으로 구형이 된 단말기 5만여대가 창고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도 96∼97년분 22만대 추가보급 비용 624억원을 확보했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국회의 예산안 심의도 아직 문제가 있다. 특히 정치논리가 투영되면 예산의 골격이 망가지게 마련이다. 여당의 선심성 공약이나 의원들의 지역구 관리를 위해 배정된 예산이 그런 예다. 한 사업을 지형적 특성과 관계없이 지역구별로 쪼개 착공하는 바람에 돈을 낭비하고 공기가 지연된 예가 허다하다.
서해안고속도로. 「서해안시대를 개막한다」는 거창한 구호와 함께 계획된 이 고속도로는 경기 안산에서 시작해 전남 목포까지 연차적으로 개통하게 돼 있었으나 『내 지역구에서 먼저 테이프를 끊자』는 의원들의 성화로 여기저기서 착공해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대형건설사업이 「쪼가리 공사」로 전락해 엉망이 돼 버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보고에 따르면 85∼94년의 216개 정부 사업 예산 집행을 집중투자 방식으로 전환했을 경우 누계 573년의 공기 단축과 7조1,582억원의 비용 절감이 가능했다.
재경원의 한 관계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예산의 틀이 흔들리고 시급한 사업에 예산을 돌릴 여유가 없어집니다. 정치논리에 의해 배정된 예산은 대부분 그렇지요. 문제는 이런 사업이 너무 많은데다 중단할 수도 없어 지속적인 예산낭비를 초래하는 겁니다』
집행단계의 낭비도 큰 문제다. 예산 집행 과정의 부조리는 실로 다양하다.
감사원이 올해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등 3,824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96년 예산집행 및 재산관리 등에 관한 서면감사(873개 기관은 실지감사)에서는 7,192건의 위법 부당사례가 드러났고 추징 및 회수보전 처분액은 4,269억원에 달했다. 95년(2,291억원)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난 액수다. 감사원 관계자는 『실지감사 범위를 확대하거나 감사 인원을 늘리면 훨씬 많은 「누수」를 적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집행단계에서 예산 낭비는 연도말 불필요한 예산 집행, 구매계약상 업자와의 유착, 예산 전용 등이 주종이다. 연도말의 불필요한 예산 집행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예산이 남으면 다음해에는 그만큼 깍이게 된다. 돈을 있는 대로 다 써야 다음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국가 재원의 적절한 분배」라는 예산의 개념과 모순되지만 그것이 아직까지의 관행이다. 이 때문에 각 부처는 연말이면 불요불급한 물품을 대량구매하고 급하지 않은 공사를 서둘러 시작한다. 도로를 마구 파헤치고, 멀쩡한 보도블럭을 갈고, 신호등을 중복 설치하거나 교체하는 일이 해마다 반복된다.
업체와 유착, 적정가 이상으로 물품을 구매하거나 같은 돈으로 질낮은 물품을 구매하고 차액을 챙기는 공무원 비리도 국민의 혈세를 좀먹는다. 한국교육방송원은 96년 1월∼97년 2월 13개 출판사로부터 방송교재를 구매하면서 403억원을 고의로 과잉지출한 것이 드러나 관련자들이 사법처리됐다.
예산을 무단 전용하거나 예비비를 엉뚱한 데 쓰는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다. 96년 결산감사 결과 정보통신부가 94∼97년 우체국 예산으로 계상된 14억7,400여만원을 본부 실·국장들에게 다달이 지급한 것 등 30개 기관, 91억여원의 전용이 밝혀졌다. 외무부는 통화요금 및 차입금 이자를 과다계상한 뒤 잔액중 6억8,000만원을 경상비로 사용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예비금을 업무 추진비 직원격려금 등으로 다달이 지급했고 경기 구리시는 농수산물 도매시장 건설 국고보조금 가운데 5억7,000여만원을 공무원 급여 등으로 지출했다.
이런 식의 편법과 관행이 통하다 보니 나라 살림은 날이 갈수록 쪼들린다. 「정부 경쟁력」이 떨어져 우리 국민은 국가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분노의 소리는 높아 가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조재우 기자>조재우>
◎대선용 예산 내년에도 또?/‘불황으로 초긴축’ 공언불구 당정협의 거치면서 각종 ‘선심예산’ 대폭 끼워 오히려 1조2,000억원 증가
대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이 선심성 사업비를 과다 편성, 예산 구조가 왜곡되고 시급한 공익사업이 뒤로 밀린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는 『대선이 코앞인데 급한 불부터 꺼야할 것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다. 나라 살림이 「표심 끌기」 수단으로 변질된 현장이다.
당정협의 과정에서 선심성 예산안이 갑자기 늘어나 「대선용 예산안 편성」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당초 정부는 『불황으로 세수가 부족해 초긴축 예산편성이 불가피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당정협의를 거친 협의안은 원안보다 오히려 1조 2,000억원이 늘어났다. 지난해 당정협의 조정액인 7,500억원보다 60%나 많은 액수다. 당정 조정액 규모가 해마다 커지고 있는 것도 선심성 사업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당정 조쟁액중 가장 선심 의혹을 피하기 어려운 부분은 「당중점사업」관련 예산안. 농어촌구조개선사업과 교육부문 투자는 대통령 공약사항 이행을 명목으로 증액된 분야. 농민을 전통적인 표밭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당의 요구로 영농지원 자금과 농어민후계자 지원금 등 농어촌구조개선사업비가 5,000억원이나 늘었다. 또 교수수당 인상과 대학·실업계 고교의 실험실습기자재 구입비 등이 626억원 늘어 났다.
관변단체 지원금도 크게 불었다.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 자유총연맹 등에 대한 지원금과 향군묘지 조성사업비가 정부안보다 35억원 많은 200억원으로 책정됐다. 올해의 110억원보다 82%나 많다. 또 「어려운 사람」에 대해 복지지원을 확대한다는 명목으로 전몰군경 유자녀 지원비, 노인복지관 사회복지시설 경로당 운영비 지원금 등을 265억원이나 늘렸다.
지방 민원이 집중된 일반 국도와 지방도로확장 지원 예산안을 정부안보다 659억원이나 늘렸고 김해·하남 경전철과 새만금·보령 신항만 등 민자유치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예산안도 687억원을 보탰다. 여당 정책위의장실에는 각지역에서 「표」를 볼모로 한 민원성 예산 요구가 빗발쳤다는 후문이다.
야당이라고 선심성 예산 챙기기에 예외는 아니다. 야당은 주로 국회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중점사업예산을 얻어 낸다. 야당의 한 중진의원은 『지역사업 등 선심성사업을 위해 우리가 확보하는 예산은 대개 300억∼400억원 규모』라고 말했다.
국회 법제예산실 관계자는 『증액되는 예산 대부분은 당차원의 정책사업이나 여당 실세와 지역구 의원의 민원성 사업 등 선거와 관련한 사업에 배정된다』며 『사업 타당성이나 경제적 우선순위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 결정되므로 산업경쟁력 강화 등 시급한 공익사업은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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