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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의 즐거움/김정휴 승려시인·불교신문사 사장(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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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의 즐거움/김정휴 승려시인·불교신문사 사장(아침을 열며)

입력
199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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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도 고통이요, 죽는 것도 고통이라고 노래 부른 사람이 신라시대 사복이다.이 세상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가장 보편적 사건이다. 다만 삶의 종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나 두려워 한다. 어떤 민족과 신분의 귀천을 따질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죽음을 해석하는 의미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장례의식도 각기 다르다.

인류의 애도 속에 다이애나는 성공회 의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리고 그의 친정인 스펜서 가문 소유의 알소프공원 인공섬에 묻혔다. 다이애나는 생전에 많은 염문때문에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우리로서는 윤리적으로 용납 못할 일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자선행위는 자신을 구원하고 세계적 왕세자비로 다시 탄생시켰다. 에이즈환자의 인권개선과 대인지뢰 방지협약 체결에 앞장 선 그녀의 인류애는 이제 역사적 삶이 됐다.

다이애나와 대조적 삶을 살았던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의식으로 장례를 치른 후 평생을 바쳤던 「사랑의 선교회」를 떠나지 않고 빈자들의 삶을 죽은 후에도 돌보기 위해 생전의 집무실 지하에 남았다. 빈자들과 한몸이 되어 법신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사랑과 봉사를 통해 성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빈자들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고 진리의 몸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 장례의식때문에 화장을 하지 않고 땅에 묻혔다. 몇 개월전 사망한 중국의 최고권력자 덩샤오핑(등소평)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고 남은 재는 양쯔강(양자강)에 뿌려졌다. 화장과 매장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색과 전통적 장례 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입적한 불국사 조실 월산 큰스님도 다비식이 끝난 뒤 재는 평소 다니던 산책길에 뿌려졌다.

특히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비정할만큼 육신을 홀대한다. 그래서 육신을 「가아」라고 한다. 소멸해 없어질 헌옷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영구히 남는 것은 불생불멸한 법신뿐이다. 이러한 교리때문에 육신을 버리는 일에 미련이나 애착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탈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해석한다. 선사들이 죽었을 때, 열반 혹은 입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열반이란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의 법신을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죽음을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입적은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 난 해탈이요, 법신의 탄생이며 적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생멸이 없어진 자리에 적멸의 세계가 있고, 적멸은 즐거움이 된다(적멸위락)」고 하였다.

며칠 전 월하 종정은 월산 스님의 영결식장에서 『스님은 나고 죽음이 없고 오고 감이 없는 자리로 가시니 얼마나 즐겁느냐』고 조사를 했다. 죽은 사람의 영전에서 즐겁다는 말은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달을 때 가능하지만 일반인의 죽음 앞에서는 하기 어려운 말이다.

삶과 죽음을 완성한 선사들은 한결같이 자기 임종을 맞아 해탈의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육신을 철저히 홀대하였다. 중국의 혜안 스님은 입적에 이르러 모든 소장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유촉하기를 『내가 열반에 들면 시신을 숲속에 놓아 두고 들불에 타도록 하라』고 했는가 하면, 일생 동안 무소유로 사신 청활 스님은 스스로 임종을 예감하고 문도들에게 『내가 입적하거든 시신을 벌레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반석 위에서 앉은 채 열반하였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닌 왕생이며 한량없는 목숨을 얻는 일이기 때문에 육신을 홀대하고 해탈의 자유를 보일 수 있었다.

육신은 소멸해도 일생을 통해 이룩한 거룩한 삶은 소멸되지 않는다. 특히 테레사 수녀는 사랑과 봉사를 통해 불멸의 자아를 성취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났다기 보다, 역사적 거인이 되어 사랑과 베품을 다시 실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역사적 법신이란 것도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몸을 버릴 때 생멸이 없는 자아는 성취된다. 테레사 수녀는 사랑만 실천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갖지 않으면서도 베풀 수 있음을 우리에게 몸으로 가르쳤다. 그는 빈자들에게 베풀기 전에 자기를 비우고 자타가 합일하는 무아를 이루고 있어 사랑과 구원이 어느 가치보다 우위에 있음을 온 인류에 입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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