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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과 번복(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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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과 번복(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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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신의다. 신의의 바탕이 없는 정치는 패도다. 정치가 신뢰를 잃을 때 공명하지 못하다. 신의를 잃은 정치인은 일부 국민을 한때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국민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 신의없는 정치인에게 미래는 없다.한국일보 9월14일자 「네오포커스」면은 「말바꾸는 정치인들」을 특집으로 꾸몄다. 올해 대통령선거의 출마 예정자들이 저마다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소신을 바꾸고 양심을 뒤집는 식언들을 다반사로 하고 있다. 자기 말씹기를 껌 씹듯이 한다. 누구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 식언중에서도 하이라이트가 아주 가까이는 이인제 전 경기지사의 당내경선에 불복한 단독출마 선언일 것이고 좀 멀리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정계은퇴선언 번복일 것이다.

이지사의 불복은 개인적인 위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룰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치민주화의 싹을 잘랐다는 점에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의 명예혁명」을 내세우지만 패덕의 불명예로 결코 명예혁명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이고, 「국민의 부름」을 갖다대지만 무슨 천상의 소리를 환청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반드시 정음일 수도 없다. 아무리 그런 미사로 도장한들 불복의 허물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대교체의 소명이 중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정치의 정도다.

김총재의 번복만 해도 그 맹세가 5년전의 것이라 하여 국민의 건망증만 믿어서는 안된다. 그해 대통령선거에 패배한 후 그가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향한 전국민의 갈채는 요란한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2년7개월만에 『아무 변명도 않겠다』면서 다시 되돌아 서더니 이제는 내려왔던 계단을 도로 올라가려고 한다. 그것이 아무리 승산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장부일언의 천금을 도로 삼킨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장부가 쉽게 소화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당자들의 실태도 실태지만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그 승산들의 출처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선 주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이들의 일구이언과 전혀 상관없다.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기의 서열은 식언의 서열이기라도 한 듯이 김총재와 이지사가 1, 2위다. 이 여론이 승산을 고무시키고 「국민의 부름」을 차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민에 대한 배신이 사면된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라면 아직도 권모술수의 기술로 아는 사람이 많다.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배반하고 하는 것이 정치의 속성인 것처럼 여겨진다. 신의없는 것이 정치가의 큰 자질이기라도 한 듯이 통한다. 이것이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다. 대선주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조사결과는 자칫 이 후진성을 고착화하기 쉽다.

우리 사회가 마찰로 삐걱대고 갈등으로 출렁대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신의가 없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배신한다. 신용과 신뢰가 찰랑한 사회가 아니다. 사위와 기만과 허세가 득세한다. 정직은 고지식한 것이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융통성 없는 것이다. 신의는 약자의 덕목일 뿐이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정치분위기를 그대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 풍조에 휩쓸려 국민들은 정치인의 약속위반에 무심하고 관대해져 버렸다.

신의가 없어지면 모든 인간사회는 무너지고 만다. 따지고 보면 모든 부정부패는 부정직에서 나오는 것이고 부정직은 신의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저마다 개혁을 부르짖지만 신의의 회복 없이는 어떤 개혁도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신의는 개혁의 출발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할 일도 많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나라에 신의를 세우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자면 많은 자질이 필요하겠지만 대통령으로서 갖추어야 할 제1의 덕목은 신의여야 한다. 신의가 곧 정직이요 약속을 지키는 일이요 도덕성의 바탕이다. 정직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덕성이 약한 대통령을 국민은 믿지 못한다. 대통령을 믿지 못하는 나라에서 신의가 설 수 없다.

「신의가 있으면 백성이 맡기게 된다」(신칙민임언)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지언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표가 있다. 반대로 신의가 없으면 백성이 맡길 수 없다. 믿음이 없는 곳에 표는 없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은 여러가지이겠지만 신의가 우선해야 한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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