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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침투 1주년 ‘그때 그사람’ 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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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침투 1주년 ‘그때 그사람’ 2인

입력
199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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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은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1주년. 지난해 9월18일 무장공비 26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강원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좌초한채 발견됨으로써 시작된 공비소탕작전은 11월5일 잔당 2명이 마지막으로 사살되기까지 49일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에 군과 예비군, 경찰 등 연인원 150여만명이 투입돼 68년 1·21사태와 울진·삼척 공비침투사태이후 최대 규모의 대간첩작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측도 11명이 전사했다. 이 사건은 초기 적침투 허용, 경계체계 미비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나 결국 완벽하게 작전이 마무리됨으로써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우리군의 대침투작전태세를 점검, 보완하고 다소 방만해졌던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작전에서 부상당한 이종갑(40) 육군소령과 유일한 생존공비 이광수(32)씨를 만나 보았다.<편집자 주> ◎유일 생포공비 이광수씨/“무지한 북 주민 불쌍해요”/한국발전도 모르고 김정일이 시키는대로 남 주민 무조건 미워해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유일하게 생포돼 살아남은 이광수씨는 자유와 풍요를 만끽하면서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가고 있다.

생포직후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해 화제가 됐던 이씨에게 연유를 물었다. 가난한 한국에 그런 음식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짐짓 해본 얘기였다는 것이다. 『그뒤로는 말 한마디 하는데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시요. 얼마나 혼났는지…』

이씨는 대남침투가 주임무인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이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했다. 공작조 수송책임을 맡은 조타수였기 때문이다. 『잠수함이 좌초된 뒤 무작정 산으로 뛰었시요. 차들이 많아서 도로를 이용할 엄두가 안났지요. 못사는 나라에 웬 차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지요』

그는 북한사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고향인 황해북도 금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82년 입대한 뒤에는 부대안에서만 지냈다. 『특수부대는 특별대우를 받으니까 주민들이 굶어죽는지 어떤지도 잘 몰라요. 결혼도 부대에서 정해주는 여자하고 했시요』

주로 군부대강연을 다니는 이씨는 요즘와서야 한국사회를 80%쯤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사회가 곧 망할 것 같았시요. 무슨 범죄가 그렇게 많은지… 서로 대통령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상해보이더만요』 이씨는 또 『「적」으로 생각했던 남쪽사람들이 『잘 왔다』며 손을 잡아줄 때마다 한없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특히 남쪽여자들이 인상적이었던 듯했다. 『TV를 보면 참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북한에서는 순종하는 여자를 제일로 치는데…』

TV에서 누가 제일 괜찮아 보이더냐는 질문에 이씨는 『무장공비가 좋아한다면 말나는 것 아니냐』고 웃으며 『KBS 「아침마당」을 진행하는 정은아씨』를 들었다.

『북한사람들은 그저 김정일이 시키는 대로, 가르치는 대로 남한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있지요. 만약 남한사정을 알게 되면 아무도 전쟁하려고 들지 않을 겁니다』 이씨는 마음이 닫혀있는 북한동포들에게 동포애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이동훈 기자>

◎부상 이종갑 육군소령/“가슴저민 전우애 못잊어”/빗발치는 총탄뚫고 붕대로 어깨 동여매준 서 대위 모습 아직 생생

지난해 11월5일 상오 7시10분. 궁지에 몰린 무장공비 잔당 2명이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창바위마을 인근 야산에서 작전회의를 하던 군단 합동신문조와 특공연대 지휘관들을 기습했다. 이로 인해 오영안 군단기무부대장과 서형원 특공연대 중대장 등 3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했다.

당시 왼쪽어깨 밑에 관통상을 입고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1년째 병상을 지키고 있는 이종갑 육군소령은 당시 상황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이소령은 『총탄이 비오듯하는 그 극한상황 속에서도 가슴저민 전우애가 있었다』며 목이 메었다. 서대위가 자신의 위험도 돌보지 않은채 이소령 자신에게 접근, 붕대로 어깨를 동여매 주었다는 것. 『괜찮으냐』고 이소령의 상태를 걱정하던 서대위는 갑자기 다리 건너편에서 병사의 비명이 들리자 『엄호사격을 부탁한다』며 다시 몸을 돌렸다. 병사를 향해 필사적으로 포복해가던 서대위는 결국 공비에게 노출돼 집중사격을 받고 산화했다. 이소령은 『제몸보다 전우를 먼저 걱정하는 서대위같은 군인이 아니었으면 공비소탕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전이 끝나고 앰뷸런스에 실린 이소령은 서울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진뒤 어깨아래 상박뼈를 이식하는 대수술을 3차례나 받았다. 이소령은 『뼈를 도려내고 다시 붙이는 말그대로의 「뼈를 깎는 고통」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엄청난 사건을 겪고서도 국민들이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또다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이소령은 『지금은 무엇보다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현지 부임 두달만에 발생한 사건으로 아직도 부대근처 집을 뜨지 못하고 있는 부인 신영희(41)씨와 여진(16)양 태희(10)군 등 남매가 매달 힘들게 문병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소령은 앞으로 한두달 더 물리치료를 받은뒤 전역할 계획이다. 『팔을 제외하고는 건강한데 병원에만 갇혀있는 것도 할 짓이 못된다』는 것. 그러나 『생계 방도를 아직 정하지 못한 것과 별 공적없이 군생활을 마감해야하는 사실이 걸려 늘 밤잠을 설친다』고 씁쓸해 했다.<김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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