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알고 지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대체로 일방적이고, 후자는 쌍방향 채널을 가질 때 쓰는 표현이다.나는 다이애나를 알지만 다이애나는 나를 모른다. 한번도 직접 만난 일이 없고 편지를 주고 받은 일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 대해 「들어서」안다. 아니 본 적도 많다. 텔레비전이 수시로 그녀의 행방을 알려준 덕분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테레사수녀 역시 그렇다. 알고 지내던 사람의 죽음에야 비기지 못하겠지만 소문을 통해 알았던 사람들의 죽음도 다소간의 감회를 불러 일으키기는 마찬가진 듯하다.
두 여자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며칠 먼저 세상을 뜬 다이애나에 대해 병상의 테레사 수녀는 조문을 못가는 형편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두 여자가 지금 하늘나라에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눌까 궁금해진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다이애나가 있는 그림은 화려했고, 테레사 수녀가 있는 풍경은 초라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본 이들에 따르면 그 반대였다. 다이애나는 불행한 신데렐라였고, 테레사 수녀는 행복한 구원자였다. 다이애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좋은 옷에 빛나는 견장을 차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수심에 가득찬 표정이었던데 반해 테레사 수녀 옆에 있던 병자와 걸인들은 기쁨에 가득한 얼굴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두 여자의 죽음 뒤에 그들을 똑같이 성녀로 취급하는 일은 부당하다는 여론도 있었다. 아마 그 판단은 시간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남의 죽음은 남아 있는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하는 일은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를 곧바로 연결해주는 까닭이다. 두 여자의 죽음은 시작보다는 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끝의 의미를 헤아린다면 지금 시작하려는 나의 작업이 아름다운 것인지 그 반대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보다 자신을 소문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이른바 공인들은 나와는 상관없게 느껴졌던 자들의 죽음이 남긴 교훈을 놓치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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