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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바람’에 독감걸린 지자체(말바꾸는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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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바람’에 독감걸린 지자체(말바꾸는 정치인들)

입력
1997.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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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 대권출마 움직임에 서울·경기 행정공백 위험수위/몇몇 도지사 무원칙한 탈당 실행되지 않는 공약 등으로 ‘세살배기 지자제’ 중병 앓고 있다정치인의 약속 위반은 지방자치제 난항의 한 요인도 되고 있다. 일부 단체장들이 선거전, 또는 당선 직후의 공언과 달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사퇴하는가 하면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공약을 내세웠다가 이행하지 못해 주민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또 이런저런 이유로 유권자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당을 바꾼 단체장도 있다.

민선 단체장이 사퇴를 선언한 서울과 경기도의 행정 공백은 이미 위험수위에 달한 것으로 얘기된다. 교통혼잡 개선과 도시계획 등 대규모 공약사업이 좌초위기를 맞았고 정부가 임명한 부시장, 부지사가 자리를 이음으로써 「민선」원칙이 깨져 버렸다.

10일 사퇴한 조순 전 서울시장은 임기를 1년여 앞둔 7월부터 대선출마를 시사하며 시정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이인제 경기지사도 신한국당 후보 경선전에 뛰어 든 3월부터 도청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결국 8일 사퇴를 선언했다. 이들은 외국의 사례를 들어 단체장 사퇴를 정당화하는 데에만 목소리를 높일 뿐 중도사퇴에 따른 행정공백이나 사업 중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그 악영향은 이미 드러나고 있다. 우선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결재권자의 부재를 이유로 민원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사업 추진을 미루고 복지부동 상태에 들어갔다. 『윗사람도 없는데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느냐』 『일상 업무나 할 뿐 다른 일을 벌일 때가 아니다』 『다음 단체장이 들어서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전임자의 정책을 고수해 무엇하겠느냐』는 자조섞인 말만이 떠돌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조 전시장이 임기내 실현을 약속했던 버스 및 택시운행제도 개선, 신청사 건립, 사회복지 5개년 계획 등 대형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 신청사 건립은 아직 초안도 정해지지 않았고 공영버스 운행 및 버스노선의 획기적 조정, 버스지원기금 신설 등은 보류됐다. 더욱이 국민적 기대를 모으고 있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둔 축구전용구장 건설 문제는 엎치락 뒤치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지사가 3월부터 몰아치기식 결재를 해 온 경기도의 행정 공백은 더욱 심각하다.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중기종합지원센터와 북부지역 무공해 산업단지조성은 거의 진전이 없고 하남 경전철 사업은 시행조차 불투명하다. 또 안산 하남 파주 등의 종합운동장 건설 문제도 예산부족 등의 이유로 보류돼 있다.

이밖에 『충북의 자존심과 주인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며 『자민련을 지지해 준 도민께 감사드린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던 주병덕 충북 지사는 불과 며칠후 정당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강원도를 위해 일하는데 정당이 문제될 것이 없다』던 최각규 강원지사도 『야당지사로는 도정 수행에 한계를 느낀다』며 2년도 안돼 무소속 지사로 변신했다. 또 『광주 전남을 통합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던 허경만 전남지사는 당선 이후 이에 대한 어떤 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선거란 당선자와 그를 뽑아 준 유권자간의 계약인데 납득할 만한 사유없이 사퇴하는 것은 무책임의 전형』이라며 『장밋빛 공약의 남발과 정당을 바꾸는 「말갈아타기」 등은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염영남 기자>

◎선진국의 경우/거짓말 밝혀지면 정치생명 끝/닉슨 사퇴 직접원인은 도청사실 보다도 사건은폐 책임 때문/외국 정치인들에게 말바꾸기란 곧 정치적 자살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는 거짓말을 한 정치인에 대해 국민이 정치적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거짓말과 공약 위반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전 총리는 재임중 한 공제조합으로부터 3,000만엔을 받았다는 스캔들이 95년에 터지자 이를 부인하다가 「차기」 후보군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수수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나중에 돌려 주었다』고 해명했지만 한번 한 거짓말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차가웠다.

미국의 차기 지도자로 꼽히며 세계적 주목을 받던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차기 대선주자 반열에서 탈락한 것도 거짓말 때문. 그는 탈세 혐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하원윤리위원회에도 허위 해명서를 제출했다가 동료 의원들로부터도 견책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다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국민들의 심판은 민주당 선거사무실을 도청한 불법행위보다도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한 은폐 공작과 거짓말에 쏠려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는 대신 3당합당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임기를 채우는 등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하고도 그냥 넘어간 정치인이 많다.

전문가들은 거짓말에 관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근본적인 문제로 들었다. 이런 관대함이 철저한 배격과 지탄으로 바뀌어야만 정치인의 말뒤집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것. 뇌물수수나 공직남용 등의 추한 죄를 짓고 온갖 거짓말을 한 사람이 다음 선거에서 다시 선출되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모두가 『나는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동정표를 끌어 모으는 묘한 현상의 책임은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경기대 통일안보대학원 유영옥 교수는 『정치지도자들의 거짓말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부르고 이 무관심이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다시 배출하는 악순환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중대한 공약 위반이나 거짓말이 드러나면 중간에 당선을 취소하거나 최소한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며 『행정부 관료와 정치인 을 배제하고 이해 관계가 없는 전문가와 시민들로 심의기구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이상연 기자>

◎유권자 이렇게 합시다/권무수 국민대 정치대학원장/‘정치란 원래 그런 것’ 하는 이상한 관대함을 버리고 준엄한 표의 심판으로 후진적 정치풍토 끝내자

지역구도를 바탕으로 한 정당정치에서 정치인의 말뒤집기나 허언, 위약 등의 행태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정치인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제1 덕목인 도덕성은 간과한 채 지역구도나 학연, 지연 등 본인의 이해관계를 좇아 움직이는데 따른 정치 후진국의 전형인 것이다. 정치인의 허언을 제재하기 위한 해결책이라곤 결국 유권자의 투표뿐인데 고착화한 지역구도, 국민의 정치 냉소주의 등이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일반인의 거짓말은 용서치 않으면서 정치인의 말뒤집기에는 「정치인이란 원래 그런것」이라며 이상하리만큼 관대한데다 또 이런 흐름이 평소 「구정치 타파」 「3김정치 청산」을 주장하는 신세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치인들은 이런 배경속에 유권자를 깔보게 돼 거짓말이나 허언 등을 남발하거나 언론을 통한 애드벌룬을 띄워 여론동향을 살핀 뒤 저항 여부에 따라 정책방향을 결정짓는 언론플레이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로인해 유권자의 정치무관심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국민이 선거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치인의 허언 악습을 타파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전망이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만 4·19와 5·16, 유신과 5·18 등 워낙 격변을 많이 겪어 온데다 군부의 오랜 독재정치, 특정 지역의 장기집권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국민 대다수가 정치불감증에 이르게 됐을 뿐이다.

국민 가슴을 열 수 있는 도덕성과 정통성을 겸비한 새로운 정치지도자가 출현해 정치를 이끌면 금세 달라질 수 있다. 해방이후 지금까지의 정치를 1세대 정치라고 보면 요즘은 불완전한 과도기일 뿐이다. 2세대 정치가 열릴 21세기에는 정치인들의 정상적인 정치행태와 이를 준엄히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투표행태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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