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열기가 고조되면서 상황변화에 따라 공인들의 공언이 거듭되고 있다/원칙과 소신 신의와 양심없이도 대선주자가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우리 정치현실서 이번에는 또 누구를 찍어야 하나 국민은 답답하다『공인된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은 참말인가?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정치인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다. 자신도 알고 국민들도 알고 있다』
대선 열기가 고조되면서 거듭되는 정치인들의 말바꾸기. 너나할 것 없이 불과 얼마전의 약속을 뒤집기 예사이고 그러고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해괴한 논리로 변명을 일삼는다.
「상황이 달라져서」라며 설득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과 「그게 그거」라는 정치 허무주의는 확산된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8월31일 『전두환·노태우씨 사면 문제를 추석 이전에 매듭짓는 것이 좋겠다』고 밝혀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므로 사면문제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 있다』며 『현 시점에서 사면 문제를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힌 것이 바로 한달 전쯤인 7월22일. 그에 앞서 4월18일에는 『법원은 사면을 전제로 판결하는 것이 아니다』며 『판결 직후에 사면 운운하는 것은 사법부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사면 문제 언급 불가」 원칙이 왜 바뀌었을까? 이대표측은 국민대통합을 이유로 들었지만 TK표를 의식한 말뒤집기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서울시장과 대권은 일체의 연관이 없다』며 『시장직을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도 없다』던 조순 민주당총재.
서울시장에 당선된 뒤에도 『대권 도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였고 95년말 민주당 탈당 때도 『시정에 전념하기 위해 당적을 떠나 남은 임기동안 정당에 가입하지 않겠다』였다. 지난해 12월에도 『시장으로서 주어진 소임을 다할 뿐 그밖의 어떤 정치적 소원도 없다』고 했다. 「제3 후보론」이 한창이던 5월에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난달 『나라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고 출마를 선언했다.
7월의 신한국당 후보경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와도 절대 승복하고 당에 남겠다』고 다짐했던 이인제 경기지사. 「정도」를 걷겠다는 모호한 말로 의중을 감추었던 그는 지난달 31일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경선과정이 불완전했으며 민심과 동떨어진 결과가 나왔다』고 말을 바꾸었고 지난 8일 경기지사직 사퇴의사를 밝히고 13일 대선 단독출마를 선언했다.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와 김종필 자민련총재도 예외가 아니다. 14대 대선 패배후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총재는 95년 지자체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정계 복귀에 성공했다. 은퇴선언 번복은 지금까지도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김종필 총재는 95년 11월까지 YS 대선자금에 대해 『모른다』였으나 96년 1월에는 『YS가 쓴 대선자금을 밝히면 여러분은 기가 막힐 것』으로 바뀌었다.
「정치인들은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에 대해 정치인들은 「변화무쌍한 정치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물론 정치 현실은 바뀐다. 누구든지 살아남기 위해 말(언)을 바꾸고 말(마)을 바꿔 탈 자유는 있다. 그러나 정치인의 약속은 필부필부의 약속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의 약속은 국민과 유권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공인이며 그의 약속은 공약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또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정치인들도 거짓말을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사회에는 나름대로의 엄정한 룰이 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거짓임이 드러나는 순간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물러나지 않고, 위약이나 허언의 이유를 국민에게 명백히 납득시키지 못하면 정치 생명이 끝난다. 유권자의 심판 이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도 관행이다.
기본적인 원칙이나 소신도 없이 정치이익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신의나 양심마저 저버린 채 말과 행동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우리나라 정치풍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인의 거짓말과 위약은 더욱 심해진다.
90여일 앞으로 다가온 15대 대통령선거. 국민은 또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의 거짓말을 들어야 할 지 모른다. 거짓말과 헛소리를 거듭해도 대선 주자가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우리 정치의 현실에서 이번에는 누구를 찍어야할까, 국민들은 답답하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일구이언’도 할말은 있다?
여야 정치지도자들은 나름대로의 상황 논리와 배경 설명으로 그동안의 말바꾸기를 해명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측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사면문제와 관련한 입장변화에 대해 『집권당 대통령후보가 된 후 대통합 정치의 필요성을 느끼게 돼 대국적인 차원에서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 측근은 또 14대 대선자금을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꾼데 대해 『여당 대표가 된 후 정확한 액수를 밝히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면서 『여야가 당시의 상황을 고백하고 진실을 밝히는 기조를 만들자는 것이 이대표의 일관된 주장』이라고 전했다.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측은 정계은퇴 선언의 번복에 대해 『이유야 어떻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정부는 무능과 독선으로 나라를 혼란과 위기에 빠뜨렸고 야당(당시 민주당)은 국민을 대변하고 정부 여당을 견제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며 『이대로 가면 나라가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평생을 정치인으로 산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정계 복귀의 배경을 설명했다. 또 『40년동안 대통령 부럽지 않은 영향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며 『여러 비난과 시련을 감수하면서까지 정계에 복귀한 것이 대통령 자리에 대한 욕심때문만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조순 민주당총재측은 『서울시장 당선후 대권도전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민선단체장으로서 2년간 직접 체험을 하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또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가 얼마나 허울뿐인지를 알고 나면 왜 대통령후보로 나설 수 밖에 없는지가 이해될 것』이라며 국무회의에서 서울시장이 말석에 앉아 발언도 할 수 없는 문제, 시내버스 매연대책을 세우다가 건설교통부의 반대에 부닥친 일 등을 예로 들었다. 『민주주의의 꽃인 지자제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그 제도의 모순을 절절히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국정의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부연도 잊지 않았다.
이인제 경기지사측은 『경선은 정당의 최대목표인 정권 재창출을 위해 가장 합당한 후보를 뽑아 승리하기 위한 것이지 패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며 『페어플레이 정신을 모토로 하는 스포츠에서도 대표 선수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해 지면 다시 선발한다』고 밝혔다. 지사직 중도사퇴에 대해서는 『행정공백 운운하는 것은 흠집내기 정치공세』라며 『지사 재임시의 비리나 업무능력 부재를 정당하게 비판한다면 모르지만 정치공세는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이상연 기자>이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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