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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치의 척도(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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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치의 척도(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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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니언 잭이 5대양에 나부끼던 대영제국의 재생을 보는 것 같다. 지난 8월31일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이후 1주일동안 전세계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전세계의 신문과 방송들은 연일 런던발 뉴스로 장식되었다. 정보화 시대는 정보원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의 패자다. 가히 대영제국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제국의 마지막 잔광일지도 모르겠다.다이애나에 대한 이상추모 열기는 당자인 영국 자체도 놀라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매력과 갑작스런 죽음의 충격이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애증을 격발시킨 것이다. 왕세자비로서의 불륜과 이혼소동 등 분방한 사생활이 오히려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대리만족감을 준 우상의 비명을 그들은 슬퍼하는 것이다. 왕실의 사생활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타블로이드판 상업주의 신문들이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분노하고 있지만, 그 옐로 저널리즘의 극성은 바로 신비로운 왕실을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국민심리의 반영이요 다이애나에 대한 추모열기는 그 심리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영국뿐 아니라 구미의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법석이었다. 언론들은 자선사업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다이애나의 업적으로 치켰지만 그것은 가슴에 단 훈장일뿐,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고 떠받들 듯이 그의 인기는 그의 스타성 때문일 것이다. 좋건 나쁘건 숱한 화제를 뿌렸다는 뜻에서 스타요, 왕실의 후광을 둘렀으므로 할리우드의 스타보다 더 전설적이다. 그가 정절의 왕세자비이기만 했다면 이런 인기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이애나를 때마침 그의 장례식 전날 죽은 테레사 수녀와 나란히 놓고 싶어 한다. 어떤 것이 진실로 세계적인 큰 죽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라도 한 듯이 뒤따른 성녀의 죽음이지만, 「세계인의 어머니」의 인류에 대한 그 위대한 봉사도 「세계인의 왕세자비」의 부명에 오히려 가려진 듯한 느낌이다. 다이애나의 사회활동이 적어도 그에 대한 익애의 출처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다이애나는 누구인가. 왜 그의 죽음이 우리나라 언론마저 그토록 흥분시키는가.

자유토론의 광장인 PC통신의 시민들 반응을 보면, 다이애나는 아무리 왕세자의 외도에 대한 보복이었다고는 하나 행실 나쁜 세자빈이요 애인과 심야의 밀회를 하다가 사고사를 당한 폐빈이다. 왕자들의 어머니이므로 더욱 용납하기 어렵다. 신데렐라의 영광과 좌절끝에 젊은 나이로 간 한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도 시민들은 버킹엄궁전과 켄싱턴궁전 앞에 큰 화원을 이루고 있는 꽃다발더미의 조의를 TV화면으로 보고 있으면 의아해 하면서도 어느새 그 열기에 동화되어 간다. 그 복사열에 절로 몸이 데워진다.

여기서 우리는 정보의 세계화를 생각하게 된다.

정보화시대를 맞아 전세계의 정보는 차츰 동질성의 것이 되어간다. 정보가 전세계인에게 평등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것 같지만 이때 정보의 가치기준에 혼란이 생긴다. 모든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 정보가치의 가장 큰 척도는 그 나라의 문화다. 같은 정보라도 문화의 차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그런데 정보의 균질화는 자칫 문화의 균질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정보의 세계화에는 함정이 있다. 1970년대에 유네스코총회가 「신세계정보질서」를 결의하고 「매스미디어 선언」을 채택한 것은 서방 강국들의 「문화적 식민주의」 또는 「미디어 제국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반기였다. 정보가 일방적으로 흐르는 강국들의 정보지배는 다른 나라들의 문화가치를 위축시키고 다른 나라들의 이익을 그들의 이익에 종속시킨다. 세계정보질서의 개선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전세계 뉴스의 3분의 2를 뉴욕과 런던에서 발신하던 시대로부터 아주 멀리 와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과열은 사실 국민정서에 맞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죽음이 필요 이상으로 미화될 때 우리의 문화, 우리의 가치관은 혼선이 생긴다. 그리고 구미의 입맛에 우리의 입맛을 맞추어 버리면 문화적 식민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이애나가 어쨌건 왕세자비로서 우리에게도 스타일 수 있다 하더라도 상처 많은 스타요 직접적으로 무슨 구원이나 위안을 준 스타는 아니다. 그의 극적인 삶과 죽음이 흥미거리일 수 있을 뿐이다. 참으로 일찍이 우리나라 어느 스타의 죽음에 이만한 경의가 바쳐졌던가.

언론으로서는 정보의 가치를 횡적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종적으로도 평가해야 한다. 한 뉴스를 오늘의 뉴스끼리만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내일의 뉴스와도 비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어떤 큰 죽음이 이만한 예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인지도 미리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다.

정보를 선택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무턱대고 세계인의 행세를 하는 것이 정보의 세계화시대인 것은 아니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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