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지역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60주년을 맞아 당시 상황을 체험해 보는 「회상의 열차」가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다. 해외이주 150년사에 가장 처절한 민족적 비극을 돌이켜 보자는 이 행사에는 국내외 동포 140여명이 참여하며, 중요 기착지와 모스크바에서는 학술심포지엄도 열린다.한국일보사가 이 장엄한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지금껏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 반인륜적 사건을 역사의 양지로 옮겨놓자는 뜻에서이다. 「37년문제」로 불리는 이 사건은 근년에야 피해 당사자들에 의해 극히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실상이 알려졌을 뿐, 우리나라나 러시아 어느쪽에도 현대사에 올라 있지 않은 묵살된 비극이다. 소련시대에는 아무도 입밖에 내서는 안되는 특급비밀이었기 때문이다. 피해 당사자들조차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80년대 후반 소련의 개방정책으로 피해자들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한·소수교 이후 서로 왕래가 시작되면서 관심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연해주를 떠났고, 이주중 어떤 고초를 겪었으며, 이주후 어떤 고난과 박해에 직면했던가 하는 감상적인 면만 부각됐을 뿐이다. 학문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려는 노력은 물론,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논의도 피상적이었다. 이 문제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던데다, 객관적인 자료 부족으로 피해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0주년을 앞둔 8일 처음으로 강제이주자 6만명의 명단이 발굴됐다. 비밀해제된 이 문서에는 17만5,000명에서 18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이주자중 3분의 1 정도의 명단과 이주명령서가 포함돼 있다. 92년에는 피해 동포들의 노력으로 스탈린의 서명이 있는 「원동지역 고려인 이주에 관한 1급비밀 정령」이 발굴됐다.
이 문서들은 중·일전쟁이 일어난지 한달여 만인 1937년 8월, 일본이 시베리아 지역도 침략하지 않을까 우려한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들의 일본 첩자활동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단기간에 집단이주를 강행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도덕적이었던지는 근년 언론매체를 통해 단편적으로 보도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모든 한인은 중앙아시아행 열차를 타라는 명령서 한장으로 짐승처럼 내몰렸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에 팽개치듯 내리게 한 뒤에는 아무런 정착대책도 세워 주지 않았다. 수십년간의 고난 끝에 겨우 터전을 마련한 그들중 수만명은 근년 민족문제 종교문제로 인한 내전으로 또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이 문제에 관해 한번도 책임을 인정한 일이 없다. 한·소 수교때에도 이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 행사는 그 고통의 당자들과 후예들을 포함한 57만 교민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명예회복 투쟁을 돕는 의미에서라도 국가적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