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언어로 멜로드라마 새 지평/분절된 시간·광각렌즈 여기에 음악이 결합한 화려한 이미지들은 진부한 ‘사랑타령’을 예술로 끌어올려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지난 몇년간 왕자웨이(왕가위·38)를 모르고서는 한국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뉴스의 중심이었다. 무협도 아닌, 느와르도 아닌 홍콩영화 「중경삼림(95)」이 20만을 열광시키면서 그는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의 이전 걸작 「아비정전(90)」과 「열혈남아(88)」는 필히 보아야하는 비디오 목록에 올랐다. 지난해부턴 명백히 그의 작품을 베끼거나 차용하는 한국의 청춘영화들 때문에 그는 넘어서야할 벽이 되었다.
올해의 신작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검열에 가로막혀 관객으로부터 차단되며 그는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홍콩에 있으면서 그는 우리영화의 관객과 제작자, 제도의 현실을 말해주었다.
주목했던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일견 싸구려 감상주의에, 겉멋만 잔뜩 들어간 사랑타령같은 그의 영화에 미국 유럽 사람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아비정전」을 보고서 나는 한방에 날아가버리는 느낌이었고, 「중경삼림」을 보고서는 그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영화사를 통해 「중경삼림」을 미국 지역에 개봉시켰다. 칸은 올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감독상까지 안김으로써 그에 대한 열광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공인한다.
왕자웨이는 이제 MTV의 영상언어로 세기말의 대안적인 감수성(Alternative Sensibility)을 확립한 스타일리스트로 인정받으며 90년대를 대표하는 영상예술가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아시아의 영화가 이국적인 감성으로서가 아니라 동시대적인 모던한 소재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왕자웨이가 말하는 90년대란. 그는 우리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속 주인공들은 늘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속에서 상심한다. 그것은 영화의 형식이 액션(열혈남아)이건, 무협(동사서독)이건 간에 마찬가지이며, 형사나 경찰, 킬러, 무사, 동성애자에 관계없이 사랑의 슬픔을 최소화하는 것이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이다. 아픈 가슴은 주위의 사물들에 감정이입되어 「비누가 웃으며 수건이 울고 있는」 사소한 감상으로 나타난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촌상춘수)처럼, 그는 감수성의 실체를 형상화함으로써 현대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르에 관계없이 멜로드라마라는 일관된 틀을 유지하는 그의 영화는 새로운 형식의 실험에 성공, 통속성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그의 영화는 스토리의 전개라기보다는 화려한 이미지들의 잔치다. 화면은 뚝뚝 끊어지거나 심하게 일그러진다. 카메라를 이용한 장난으로 그칠 수 있는 그의 형식 실험은 그러나 그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제시함으로써 한단계 상승한다. 1-2-3-4-5-6이 아닌 1-1-2-2-3-3의 프레임진행은 시간에 분절감을 가져와 새로운 시간 개념을 만든다. 광각렌즈의 사용으로 그는 좁고 답답한 홍콩을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켰으며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도시의 풍경을 찍어냈다. 여기에 서양의 대중음악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그의 음악 감각이 결합돼 보는 듯, 듣는 듯한 그의 영화가 완성된다.
그의 한계?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질려버릴 위험이 많다. 대중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사랑을, 가장 화려하게 포장해내는 그의 화면 수사학은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타락천사(96)」가 그의 영화중 가장 비난을 많이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작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는 한층 깊어진 사유와 절제된 감성으로 이런 우려를 벗어던졌다. 새로운 경지로의 도약이었다. 감수성과 이미지와 팝송을 결합시킨 그는, 세기말의 포스트 모던 멜로드라마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왕자웨이 베끼기/한국영화,그것도 벅차다
왕자웨이식 영화. 이것은 한국영화의 현실이자 벗어나야 할 한계이다. 스텝 프린팅(1초당 24프레임으로 찍는 정상속도에 비해 초당 12, 8, 6 프레임으로 찍은 뒤 이를 24프레임 길이로 프린트 하는 것)과 광각 렌즈의 사용, 주인공의 내레이션, 팝송의 사용 등이 왕자웨이표의 전매특허라면, 평론가 정성일씨가 이야기한 「표절주의 이데올로기」에서 한국의 젊은 영화는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영화는 그의 영화에서 스토리와 인물 배치까지 가져왔다. 어떤 영화는 그의 화면 기술을 전 영화의 절반 정도로 채웠다.
한 사람의 영화찍기 방식은 시대의 양식이 될 수 있다. 「고다르적」이라는 말처럼 「왕자웨이적」이라는 말이 새로운 형용사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왕자웨이의 영화들은 쉬워보인다. 누구나 그렇게 멋을 부려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왕자웨이적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가치는 그가 새로움을 늘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스텝 프린팅이나, 광각 렌즈는 이전에도 있었던 영화 기법이다. 에피소드식 전개나 내레이션 식 진행 역시 소설가들의 형식 실험에서 가져 왔다. 중요한 것은 기법과 이야기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그의 감각이다. 이것은 기존의 것에서 늘 벗어나려고 하는 그의 실험성 때문에 가능했다.
때문에 왕자웨이 영화의 외면을 따라잡으려고 했던 한국 영화의 몸짓은 공허하다. 다가섰다고 생각할 때, 그는 또다른 새로움으로 앞서 갈 것이며 완벽한 새로움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늘 뒤만 따라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이윤정 기자>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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