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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의 ‘알시’(이광호의 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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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의 ‘알시’(이광호의 시 읽기)

입력
1997.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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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순수성에 대한 그리움정진규 시인이 「알」을 주제로 한 시집 「알시」(세계사 발행)를 내놓았다. 그는 몇해 전 「몸」을 주제로 한 시들을 묶어낸 바 있다. 「알시」는 「몸시」의 다시 쓰기이며, 연장이며, 심화이다.

「몸시」가 주로 마음과 몸의 내적 연관에 관한 시쓰기라면, 「알시」는 보다 넓은 시야를 통해 생명으로서의 몸, 몸으로서의 생명에 관한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시인은 「알」에서 생명의 경이로운 절대적 순수성과 완전성을 본다. 물론 시집의 모든 시가 「알」을 직접적인 소재로 하고 있지는 않다. 「알」이란 각각의 시를 밑자리에서 통어하는 일관된 주제이다. 「알」이란 각양각색의 사소한 생명의 대표명사 같은 것이다. 「알」은 「산수유」 「수달」 「포도를 먹는 아이」 「암탉」 「감나무 새순」같은 작고 따뜻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완전하고 강한 생명을 대표한다.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의 「알」이며, 「알」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우주이다.

이 「알」의 세계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시인의 어조는 마치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천진스럽다. 시인의 맑은 눈은 우리가 일상에 발목이 붙들려 있는 사이 눈치채지 못한 빛나는 생명의 징후들을 발견한다. 「만개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살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네 몸 속에 내가/ 벌거숭이로 묻혀 꽃거름이 되랴/ 꽃거름이 되랴 내가!」, 이런 느낌표를 동반한 구절들은 생명현상에 관한 발견과 도취의 황홀감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알몸의 감각으로 세계와 접촉하는 섬세한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고, 둥글고 따뜻한 것에 관한 가슴 벅찬 그리움이 담겨 있고, 생명의 존재방식에 관한 생태학적 통찰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알시」는 해답이 아니라 그리움을 동반한 물음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자체로 정확하고 완전하고 그래서 경이롭지만, 우리의 현대적 삶은 모순과 분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정진규의 「알시」는 생명의 순수성에 대한 우리 모두의 슬픈 그리움을 대변한다.<문학평론가·서울예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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