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국제예술제 개막공연(3, 4일 포스트극장)이 끝나가면서 깔끔하게 등장했던 야마다 세쓰코는 엉망이 됐다. 어느새 외투가 벗겨져 있었고 한쪽 볼과 맨발에는 톱밥이 묻어 있었다. 한 사람이 한 시간 가까이 무용공연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걷기만 해도 굉장한 운동인데 그렇게 다양한 몸짓을 만들어내니 오죽하랴 싶었다.이번 작품 「속도의 꽃」은 93년 제1회 창무국제예술제에서 봤던 그녀의 「아버지의 신발」과는 인상이 매우 다른 것으로 원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요즈음은 내로라 하는 무용가 중에 기막힌 기교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니 기교가 탁월하다고만 해서는 그의 춤을 충분히 묘사하기 어렵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뭔가가 있었는데 마치 자기최면에 걸린 사람이 정신없이 흘리는 땀을 보여주는 것이 「속도의 꽃」 같았다. 추는 이유는 달랐지만 춤에는 항상 보여주는 것과 추기 위한 것이 있었음을 갑자기 기억해냈고 무용가의 기량이 아니라 춤에 도취한 무용가의 모습을 본다는 점에서 「속도의 꽃」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춤의 형태를 하나로 묶어낸 발명품으로 보였다.
인체의 움직임을 탐구하지 않는 무용가가 있을 수 없겠지만 세쓰코는 관절의 마디마디까지를 다루는 섬세함의 극치를 보였으며 자유로움 안에서 일본 부토무용가들이 지닌 특유의 정제미를 잃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에서 풍기는 흥과 끼가 대단하면서도 정작 얼굴은 무표정했고 우리나라 창무회의 어깨춤처럼 보이는 흥을 돋우는 굴신동작이나 서양춤의 작위적인 포즈 같은 것도 간혹 섞여있는 절충적 스타일이었다. 구성 면에서도 완벽하게 관객을 배려하고 있어 춤을 보는 그의 시각이 매우 넓어졌음을 자신있게 내비쳤으니 즉흥부토무용가들이 보여준 지루한 혹은 발작적인 한계에 물꼬를 터 준 셈이다.
춤으로 다져진 몸과 절정을 넘어 흘러넘치는 자연스런 몸짓, 그리고 춤을 끌어나가기 위한 고민의 흔적까지 전문가의 면모를 갖춘 세쓰코를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무용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문애령 무용평론가>문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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