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어환경 국어습득에 한계/꾸짖기보다 ‘조국찾는 마음’ 격려를지난 봄 우연한 기회에 내가 사는 캐나다의 이웃 마을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K씨를 만났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의 외동딸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에 영어선생으로 나가 있는데 어느 주말 역시 교포인 친구 한명과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한 중년남자가 느닷없이 『야, 너 한국사람인데 한국말로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놀라기도 하고 불쾌해진 K양이 『It’s None Of Your Business(왜 남의 일에 간섭하십니까?)』라고 영어로 대꾸를 했더니 이 남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뺨을 후려갈기더라는 것이다. 이 믿기지 않는 일을 국제전화로 전해 들은 K씨 부부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K양이 당한 봉변은 극단적인 예로 치더라도 교포 자녀들이 말로만 듣던 모국을 방문해서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참을 수 없는 모욕, 심한 경우에는 「비애국자의 자녀」라는 누명까지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가지 역설적인 것은 지금 한국에서는 온 겨레가 세계화를 외치며 영어를 배우는데 가히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영어가 진서가 되고 우리말은 그야말로 언문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꼴이니 이대로 가면 우리말이 제2외국어 같은 대접을 받게될 날이 오지 않을까. 우리의 영어의 사용은 도가 지나쳐서 문장 하나에 영어 단어 한두개쯤 섞어야 유식한 말로 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신문 잡지에도 「뜨거운 감자(Hot Potato)」 「레임 덕(Lame Duck)」 등의 어려운 말들이 YS니 JP, DJ같은 사람 이름의 영어 약자와 함께 쓰이고 있다.
이러면서도 K양 같이 영어는 능통하나 우리말이 서툰 교포자녀들은 백안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반응이 애국심 때문인지, 영어에 대한 선망이 질투로 변해서 그런지, 선뜻 판가름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어를 배우는데 열심이지만 말을 익히는데 필요한 언어환경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것 같다. 50∼60년대에 우리나라에 살던 화교가 그네들의 모국어인 중국어에 능통했던 것은 그들의 애국심이 유별나서라기 보다는 언어환경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밖에 나가면 「뙤놈」이나 「짱꼴라」로 냉대를 받는 한국사회에서 자기네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사는 것이 심리적으로 큰 안정감을 주었고 이 안정감이 화교집단의 응집과 결속을 촉진하여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전수하기가 쉬운 언어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또 지금부터 100∼150년전, 인종차별이 심했던 캐나다나 미국에 살았던 화교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다. 사회 전반에 퍼진 차별대우 때문에 백인사회로 뻗지 못하고 자기네끼리 모여 사는 환경에서는 모국어인 중국어를 자녀들에게 전수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줄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한층 너그러워진 요즘 북미 대륙에서 이민 보따리를 풀자마자 주류사회에 뛰어들어 경쟁을 시작하는 화교의 자녀들은 모국어를 배우는데 우리 못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 비해서 차별대우가 적은 캐나다나 미국에 사는 교포자녀들이 우리말을 배우기가 더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교포자녀들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것은 결코 민족성이나 조국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언어환경 때문이다. 따라서 교포자녀들을 「비애국적」이라고 꾸짖기보다는 우리말을 배울 적절한 언어환경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이해해 주어야겠다. 서로 총뿌리를 겨눴던 북한 동포들이 굶고 있다고 쌀을 보낼 정도의 관용과 사랑이라면 우리 교포 자녀들의 우리말 배우는 노력에도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해마다 많은 교포 자녀들이 조국을 이해하고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그러나 K양과 같은 대접을 받고도 한국말을 배우고 싶은 의욕과 아버지 어머니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는 교포자녀는드물 것이다.<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 교수>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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