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말 이어령 교수의 「드롭스와 스태미너」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이교수는 이 칼럼에서 서양인은 드롭스를 입에 넣으면 그것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빨아 먹는데 반해 한국인은 열이면 열, 한두번 빨다가 우적우적 씹는다는 것이었다. 이교수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우리의 조급성. 이교수의 지적에 예외가 아니었던 필자는 그 이후 드롭스를 먹을 때면 서양인처럼 먹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매번 실패였다.그런데 70년대 어느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서 이교수의 논지를 비판하는 글을 접했다. 드롭스를 우적우적 씹는 한국인들의 기질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과단성이 있는 것으로 좋게 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이교수가 그 칼럼을 쓸 때는 낙후한 현실을 배경으로 우리 것, 그리고 우리 기질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지배하던 시기였고 반론을 읽은 70년대는 경제성장의 성취를 바탕으로 부정적으로 보아왔던 우리 것과 우리 기질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던 시기였다.
조순 서울시장의 대통령출마선언과 그 뒤를 따르려는 이인제 경기지사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생각난 것은 이교수의 그 칼럼과 그에 대한 반론.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빌 클린턴의 경우에서 보듯 미국 대통령들의 다수는 주지사출신이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현 대통령은 파리시장을 역임했다. 주지사와 시장으로서 행정실무를 쌓고 또한 그 행정능력을 검증받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와 이 지도자들의 행태는 드롭스 먹기에서와 같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주지사와 시장으로서 상당한 경력을 쌓은 뒤 대권에 도전한 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두 사람 모두 임기도 채우지 안은채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그것도 초대 민선 자치단체장의 자리를.
우리의 조급성이 서양이 200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30년만에 이룩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압축성장이 조급성의 긍정적 측면이라면 내실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부정적 측면 일 것이다. 두 민선 자치 단체장은 어떻게 드롭스를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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