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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할머니들의 자존(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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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할머니들의 자존(장명수 칼럼)

입력
1997.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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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한 여자의 생을 바라 보고 있다. 모국어는 물론 자신의 이름까지 잊은 여자, 「훈」이라는 캄보디아 이름 대신 이남이라는 본명을 찾은 여자, 55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부모의 산소에서 통곡하는 여자, 72세의 그 「정신대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경남 마산 진동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 일제의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캄보디아에 배치됐다. 끌려갈 때 초경도 치르지 않은 어린 몸이었던 그는 하루 20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같이 살자는 일본군 장교와 캄보디아에 남아서 딸을 낳은 그는 곧 버림받고, 다시 캄보디아인과 결혼해 1남2녀를 낳았으나 남편의 주사를 못견뎌 헤어졌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외국인을 닥치는대로 죽이던 공포의 세월, 그의 아들은 살해됐다. 철저하게 파괴되어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망각했던 그 한국여성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희생자일 뿐인가.

군대위안부의 강제동원과 운영에 정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던 일본정부는 잇달아 관련사실이 드러나자 93년 이를 시인했으나, 65년 한일협정에서 국가배상이 매듭지어졌다는 이유로 국가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군대위안부의 비인도성을 폭로하는 증언이 계속되고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편법으로 등장한 것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다. 95년 7월 발족한 국민기금은 피해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민간배상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다.

발기인 중에는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고, 국가배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람들과 국가배상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그들은 『피해자들이 연로하기 때문에 민간배상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설립취지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고발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과거에 대해 알게 됐다』고 피해자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기정부를 향해 진실을 밝히라는 압력을 가하지 않고, 피해자들이 돈을 받도록 설득하는 일에만 매달리는가 라는 세계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아시아의 피해국들이 그 기금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 기금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과 의료보조비 등으로 500만엔(3,800여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는데, 제안을 받은 아시아의 피해자들중 10% 정도만이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1월 7명이 그돈을 받았고, 8월에 방한했던 기금 관계자들의 설득으로 20여명이 보상금 수령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자존을 잃은 피해자들이 가해국인 일본의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 선언이다. 민간단체가 한푼 두푼 모금한 「위로금」에 대한 모욕감, 국가의 배상과 사죄없이는 달래지지 않는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그들의 현실이다. 그들이 「위로금」이라도 받기로 했다면, 누가 무슨 권리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갈등을 알면서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비인도적인 처사다. 그들의 자존을 시험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일본의 민간기금을 비난하고, 그 돈을 받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못마땅하게 여길게 아니라 우리자신이 그 돈 이상의 보상금을 그들에게 보장해 줘야 한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대협과 한국일보가 벌이고 있는 정신대 돕기 국민모금 운동에 기대가 크다.

나라가 있었다면 왜 17세짜리 남이가 군대위안부로 끌려갔겠는가. 해방후 되찾은 나라가 똑똑했다면 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잊도록 버려졌겠는가. 전쟁이 끝나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군대위안부들을 찾으려고 국가가 어떤 노력을 했던가. 지금도 우리나라는 약한가. 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돈 500만엔 앞에서 갈등을 겪게 할만큼 가난한 나라인가.

일본이 국가배상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국제적 압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정신대 할머니들의 자존을 우리가 먼저 지켜줘야 한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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