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한국 세계에 알리고 싶어”/좋은 오케스트라 만들려면 단원·지휘자·행정 한몸돼야/56년뒤 세계순회연주 계획 북한돕기 음악회 꼭 열고파세계적 지휘자 정명훈(44)씨가 98년 1월 KBS교향악단의 제5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다. 정씨는 이에 앞서 1일 상오 11시 여의도 KBS신관 5층 국제회의장에서 홍두표 KBS사장과 만나 내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기로 합의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정씨는 매년 10주 한국에 머물며 KBS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연주회 1건당 3만달러(약 2,700만원)의 개런티를 받는다. 또 KBS교향악단의 연주회 프로그램 및 협연자 결정, 단원 인사권을 갖는다. 정씨는 취임에 앞서 11, 12일 KBS교향악단과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다. 정씨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편집자>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게 된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한국인으로서 한국청중 앞에서 지휘하게 된 것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항상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KBS와는 3년 계약을 했지만 우리나라와 평생계약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되어 KBS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KBS는 정명훈씨 영입을 계기로 KBS교향악단을 일본 NHK교향악단이나 영국 BBC교향악단처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오케스트라가 그만큼 성장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인데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그 질문은 잠시 뒤로 미뤄 주십시오. 오케스트라 수준향상은 지휘자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힘을 합치면 생각보다 빠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요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100명이 모여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비즈니스로는 안맞지요. 그래서 지속적 투자가 필요합니다. 좋은 오케스트라를 만들려면 수준 높은 단원, 거기 맞춰 그들과 일할 수 있는 지휘자, 꾸준한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시간이 해결합니다. 이 세가지가 지금 다 갖춰진 건 아니지만 KBS가 많은 지원을 약속, 앞으로 잘 맞춰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여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제의를 받고도 거절한 것으로 압니다. KBS행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같이 손잡고 일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타이밍이 맞았어요. 바스티유오페라를 떠나 시간 여유가 생겼고 제 아이들에게도 더 늦기 전에 한국을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음악을 통한 사회활동, 특히 어린이·청소년·환경 등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클래식은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음악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음악은 청소년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좋은 음악에 귀를 열어야 우리의 앞날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환경문제를 포함한 사회의 여러가지 갈등을 해소하는데도 음악이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KBS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특별공연과 기획공연을 통해 청소년·환경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TV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돕기는 개인적으로라도 꼭 할 것입니다. 올 여름 북한돕기 음악회를 하고 싶었는데 정부가 만류했어요.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갔어도 한쪽이 굶어 죽어가면 마음으로부터 사랑이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돈보다 마음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음악회를 하고 싶었는데…』(정씨는 3월 호암예술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1억원을 북한돕기 성금으로 대한적십자사에 기탁했다)
―KBS교향악단의 연주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물론 제 첫째 임무는 KBS교향악단의 연주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장기 프로젝트이고 청소년·어린이·환경 관련 프로젝트는 당장 올 가을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기연주는 연 5회 정도, 청소년을 위한 음악방송이나 음악회는 적어도 두 번, 환경 관련 특별 프로그램도 1회는 꼭 할 것입니다. 지방순회도 하고 봄 여름 가을 중 한 철을 골라 페스티벌도 열고 싶습니다. 3년 후부터 KBS교향악단과 함께 아시아를 돌면서 우리나라를 알리고 싶습니다. 5∼6년 뒤에는 세계순회 연주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우 가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족과 지낼 때 무엇을 하십니까.
『저는 음악과 가족 외에 다른 생활이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죠. 애들과 운동도 하고 요리도 좋아해 자주 합니다. 이탈리아요리를 즐겨 하지요. 음악가가 안됐으면 요리사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정씨는 부인 구순열, 세 아들 진(16) 선(14) 민(12)과 함께 파리에서 산다. 아버지 정순채(작고), 어머니 이원숙씨의 4남3녀 중 여섯째로 지휘 외에 피아니스트로 누나 명화(첼로)·경화(바이올린)와 정트리오로도 활동하고 있다.<오미환 기자>오미환>
◎그간의 협상경과/10년전부터 거론 작년 구체화/이산타 체칠리아 악단도 맡아
정명훈씨 영입론은 10여년 전부터 거론됐지만 KBS교향악악단이 상임지휘자를 물색하던 지난해 구체화했다. 정씨는 협의과정에서 KBS가 얼마나 교향악단을 지원해줄 수 있는가를 우선 고려했다. 정씨가 KBS상임지휘자로서 받는 개런티는 소속 매니지먼트사 규정에 따른 최저액. 겸임하는 음악감독직은 별도의 보수지급이 관례이나 정씨는 고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사양했다.
정씨는 상임지휘자로 있는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교향악단과 함께 내년부터 KBS교향악단을 맡아 2개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됐다. 이에 따라 KBS교향악단에 전념할 수 있겠냐는 우려도 있지만 일정을 조정하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KBS교향악단의 공연을 정씨 혼자 지휘하는 것은 아니며 유명 지휘자가 여러 오케스트라를 맡는 게 최근 추세이다.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는 총 연주 중 3분의 1은 상임, 3분의 2는 외부 초청 객원이 지휘하는 방식을 택해 음악적 안정감과 신선감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정씨의 국내체류 기간은 연간 10주로 한 번 올 때마다 1주일 머문다고 가정하면 총 10회 지휘하는 것이 된다. 산타 체칠리아 체류는 연간 12주.
과거에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뉴욕필, 유진 오먼디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자가 한 오케스트라와 평생을 같이 하는 예도 있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여기저기 옮겨다니거나 동시에 여러 단체를 맡기도 한다. 캐나다 몬트리올심포니, 프랑스 국립교향악단, 일본 NHK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3개 대륙을 오가는 샤를 뒤투아가 대표적이다. 「철새」현상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개성이 사라지고 「더 이상 거장은 없다」는 지휘자 위기론도 나온다.<오미환 기자>오미환>
□약력
▲53년 1월22일 서울 출생(44세) ▲61년 미국 메네스음악학교 입학(피아노·지휘 전공) ▲74년 줄리어드음악원 대학원 입학.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 입상 ▲84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 취임 ▲89년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 음악감독 취임 ▲90년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 ▲92년 유엔 마약퇴치대사 위촉 ▲94년 바스티유오페라 음악감독 사임 ▲95년 프랑스 「음악의 승리」상 수상 ▲96년 대한민국 명예문화대사. 한국국적 회복. 일본 ABC음악재단의 「96 ABC국제음악상」 수상 ▲97년 아시안필하모닉 창단. 삼성복지재단 호암예술상 수상.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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